독립운동가 임병찬 선생(1851.2.5~1916.5.23)

2024. 5. 23. 12:12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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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임병찬 선생(1851.2.5~1916.5.23)

대한독립의군부 결성, 의병전쟁 주도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우리나라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이에 매우 슬퍼하던 면암 최익현 선생이 호남지역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이를 기회로 본 임병찬 선생은 최익현 선생을 만나 의병활동을 시작합니다.

최익현 선생과 임병찬 선생은 사제의 연을 맺게 되었으며 실제로 최익현 선생이 병권을 위임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병권을 위임 받은 선생은 전라북도 무성서원에서 의병부대를 만들었고 사방 고을에 의병 격문을 돌리며 군량미와 군기를 향상시켰고 약 1천명에 해당하는 부대원을 갖추게 됩니다.

실제로 의병활동을 하며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이루어냈던 선생은 의병 부대간에 노선과 이념이 달라 살상을 할 위기가 처하자 (훗날 독립군들의 자유시 참변 같은 상황을 우려하여) 의병부대를 임시 해산시켰고 그 때를 기다렸던 일본군은 선생이 의병부대를 해산하자마자 붙잡아 대마도에 감금시켜버렸습니다.

그 후 설상가상으로 최익현 선생이 단식으로 항쟁하다 순국하셨고 1907년 1월 임병찬 선생은 유배지로부터 돌아오게 됩니다.

1910년이 됩니다. 국권이 완전히 상실되었을 때 고종황제는 선생에게 밀명을 보냅니다.
'임병찬 의병장을 독립의군부 전라도 대장에 임명한다' 고종황제는 국권을 만회할 목적으로 독립의군부라는 군사조직을 전국적으로 조직하며 무력투쟁을 추진할 계획을 구상하였고 1906년도에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선생의 활약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라를 빼앗긴 직후 바로 밀명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의병활동을 경험하며 고종황제가 내린 임무를 수행하는데 본인이 적합한 인물인지를 고민하던 선생은 여러 차례 명을 거두어 달라 상소를 올렸으나 1913년 고종황제의 2번째 부탁에 명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이미 오랜 시간 마음속에 품었던 전략과 독립운동방향이 있었고 앞으로 독립의군부를 이렇게 이끌어야 한다는 전략 및 활동방법을 <관견> 이라는 책으로 엮어 고종황제에게 제출합니다.

1914년 3월 선생은 각도 각군의 대표를 선정하여 편성하였고 조선총독 및 일본 주요 관리들에게 한국을 부당하게 뺏은 부당성을 깨우쳐주고 대규모 의병전쟁 준비를 시작합니다.

3.1운동 전과 후의 독립운동 그리고 일제의 대응 정도는 180도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씀 드리자면, 3.1운동 전에는 대부분 의병활동과 민족정신교육이 주를 이루었고 그 이유는 을사늑약, 단발령, 명성황후 시해 등이었으며 이 때까지만 해도 독립운동을 비폭력, 즉 말로 대응할 수 있다고 믿어온 것이죠. 실제로 의병대장을 맡았던 선생은 일본 총독에게 직접 면담을 요구하고 찾아갔으며 '국권반환요구서'를 내밉니다. 하지만 이때를 노린 일제는 선생과 독립의군부 간부들을 투옥시킵니다. 일제의 이런 비겁한 행동에 선생은 자결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거문도에 유배된 후 단식으로 다시 한번 자결하려 했고 이 또한 뜻을 이루지 못하다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