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송헌주 선생(1880.10.22 ~ 1965.7.31)

2024. 7. 31. 12:24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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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송헌주 선생(1880.10.22 ~ 1965.7.31)



'헤이그특사 3인방' 만 기억되서는 안된다. 그들에겐 숨은 조력자 송헌주 선생이있었다.



우리가 할 일을 아니하고 남의 힘으로 독립을 이룰 수 없다.



송헌주 선생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독립운동가이다. 처음 독립운동가 잊혀진 영웅들을 작업할때 안중근만 기억되서는 안된다. 이토 히로부미 척살에 숨은 조력자 유동하 선생을 기억해야한다고 주변에 말했었는데 송헌주 선생은 거의 같은 논리로 헤이그특사 3인방의 숨은 조력자라고 생각하면 된다.



선생은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지금까지 미주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안창호 선생과 박용만 선생에게 국한되었었다. 특히 이런분들을 국민들이 기억해주길 바라며 잘 읽어주기를 바란다.



1907년 고종황제는 송헌주 선생에게 특명을 내린다. 내용은 헤이그 특사로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보낼테니 그들을 안내하고 도우라는 말이었다. 선생은 즉시 임무를 수행했고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의 특사로 참여한뒤 통역관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호소했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로 임무를 이루지 못한 선생은 지식인으로서 통역관으로서 역량을 키우기위해 미국으로 향한뒤 로녹대학과 프린스턴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그 뒤, 1919년 3월 선생에게 들려온

조국의 목소리.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3.1운동의 시작이었다.



뒤이어 이어진 1919년 4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



선생은 3.1운동이 미주에 알려지자마자 하와이 한인들을 규합해 '독립금' 자금마련에 매진하였고 1919년 4월부터 6월까지, 2달간 5만달러 약정, 현금 3만5천달러를 모아 전액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지원하였다. 1939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미주 한인단체의 통합을 위해 헌신하였다. 당시 선생이 한 말이다. "미주 한인 전체의 역량을 집중하여 임시정부를 후원하며 국민선전에 노력한다" 1941년 선생은 캘리포니아 주 민병대 소속 한인국방경위대 정위가 되었다.



지식인에서 장교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어쩌면 선생은 장교로서 한국광복군에 참여하여 직접적인 투쟁의 기회를 모색했는지도 모른다. 당시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노선차이로 둘의 사이는 좋지않았고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완전히 좌천되었으며 태평양전쟁 직후 집행부 위원으로 참여하며 국방과장을 맡았었기에 이런 추정은 가능성이 있다.



1945년 해방의 해에 선생의 나이는 65세였다. 선생의 국내 복귀와 관련되서는 많은 견해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다.



1) 이승만 대통령과의 대립

2) 재정적인 부담 및 고령의 나이

3) 미주에서의 삶에 익숙해진 1세대 이민자



이유야 어찌되었건 선생은 LA에서 상점을 경영하다가 1965년 7월31일 85세의 나이로 사망하셨고 로스데일 공동묘지에 묻혔다. 선생이 돌아가신지 30년이나 지나, 대한민국정부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자료

http://tvcast.naver.com/v/437923

네이버캐스트

7월 송헌주 선생

tv.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