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순 선생(1860~1935) – 최초의 여성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

2024. 8. 4. 13:33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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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순 선생(1860~1935) – 최초의 여성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



윤희순 선생은 1860년 경기 구리에서 태어났다. 16세에 강원 춘천의 집안으로 시집을 갔는데, 시아버지는 춘천 지역 의병장 유홍석 선생이었다. 20년 뒤 36세에 첫 아들을 얻었으나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아버지가 집안을 잘 지켜달라며 본인과 함께 의병에 참여하려는 윤희순 선생을 말렸으나 경기, 강원, 충청 등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확산되자



“비록 여자라 해도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어린 아들을 친척집에 맡긴 뒤 의병에 뛰어든다. 당시는 1896년 도이다. 정말이자 깨어있던 신 여성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시간이 지나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되고 광무제국(조선)의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다시한번 전국적으로 의병항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때 윤희순 선생은 다시 의병을 일으켰고 1908년까지 강원도 춘성군 가정리 여우천 골짜기에서 30여명의 여성으로 이루어진 의병대를 조직하고 탄약제조소를 운영하여 의병대원들에게 화약을 공급하는 등 매우 적극적인 무장투쟁활동에 앞장섰다.



또한 ‘안사람 의병가’ , ‘병적의 노래’ ,‘경고한다 오랑캐들에게’ , ‘병정가’ , ‘왜놈앞잡이들아’, ‘애달픈노래’ , ‘금수들아 받아보거라’, ‘왜놈대장보거라’ ‘의병군가’ ‘방어’ ‘병정노래’ 등 총 12편의 의병가를 직접 지어 의병들의 사기를 드높이는데 재능을 발휘했다.  



위 사진은 강원대 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원본이다. 윤희순 선생의 손자 류연익씨가 한권으로 묶은 것이 보존되어 있다.



안사람 의병가

우리나라 의병들은 나라 찾기 힘쓰는데

우리들은 무얼 할까 의병들을 도와주세

내 집 없는 의병대들 뒷바라지 하여 보세

우리들도 뭉쳐지면 나라 찾기 운동이요

왜놈들을 잡는 것이니

의복 버선 손질하여 만져 주세

의병들이 오시거든 따뜻하게 만져 주세

우리 조선 아낙네들도 나라 없이 어이 살며

힘을 모아 도와주세 만세 만세 만만세요

우리 의병 만세로다


윤희순 선생이 만든 의병부대 내 여성 의병들은 의병대 내 취사와 세탁을 맡고, 군사 훈련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윤희순 선생은 무장투쟁뿐만 아니라 교육운동에도 큰 역할을 수행했다.



윤희순 선생은 1910년 한일병탄조약으로 (한일병합조약으로 우리가 교과서에서는 배웠다. 그러나 무력에 의한 침탈 이라는 의미의 ‘병탄(倂呑)’이 더욱 정확한 용어이니 지금부터라도 병탄조약으로 쓰기 바란다. 이것은 ‘을사조약’ 대신 ‘을사늑약’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나라가 무너지자 1911년 4월 만주로 망명했다. 선생은 조선, 중국인 항일연대단체인 ‘무순 조선독립단’과 ‘조선독립단 가족부대’를 연달아 조직하며 군사훈련을 직접 받았고 일제와의 투쟁을 이어갔다. 또한 민족의식 고취 등 정신교육과 역사를 가르치는 ‘노학당’을 설립하여 교육에 대한 강조 역시 아끼지 않았다.



대한제국(조선)의 국권피탈 과정

1876년 2월 강화도 조약

1904년 2월 한일 의정서

1904년 8월 제1차 한일 늑약

1905년 11월 제 2차 한일 늑약

1907년 7월 한일 신 늑약 (=정미늑약)

1909년 7월 기유각서

1910년 6월 경찰권 피탈

1910년 8월 한일 병탄조약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제1차 한일 협약을 포함한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무효임을 확인하였기에, 모든 조약을 늑약으로 처리했다. 1910년 8월 한일 병탄조약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하자면, 당시 1910년 8월 22일 오전 10시 40분에 해당 조약안이 심의 되었다. 당시 자리에는 데라우치 통감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있었다. 당시 일본의 행정법 절차는 다음과 같다. 내각에서 조약 심의 회의 -> 메이지 일왕의 최종 재가 -> 재가를 받은 원문을 받아 조약 체결 순서로 진행되었다.  당시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조약을 체결한 시간은 오후4시였다. 그러나 메이지 일왕의 재가가 떨어진 것은 오후 6시 30분이었다.



당시 행정법 절차를 무시하고 조약을 체결했으므로 이 조약은 타당성을 갖기 어렵다. 위 사료는 일본 도쿄 국립공문서관 (옛 내각문고)에서 발견된 귀중한 자료이다. 무력에 의한 강제 조약을 더하면 병탄조약, 강제조약 이라 부르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



만주에서도 선생은 끝까지 독립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만주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 망명가족들의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앞장서고, 항일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자신이 지은 의병노래를 전파했으며, 독립군 인재양성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 노력의 산실로 선생의 아들 류돈상 선생역시 독립군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1935년 류돈상 선생은 일경에 검거돼 고문을 당했고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윤희순 선생은 ‘일생록’ 말미에 “매사는 자신이 알아서 흐르는 시대를 따라 옳은 도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살아가길 바란다. 충효정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남겼고, 비통함을 이기지 못한채 아들이 세상을 떠난 지 11일 되던 날 별세했다.



선생은 40년간 의병과 독립운동에 매진하였고, 시아버지 류홍석 선생은 의병장으로 활동했으며, 아들 류돈상 선생은 대한독립단원으로 활동하다 무순감옥에서 서거했고, 아들과 함께 독립운동활동을 하던 사돈 음성국 선생 역시 피살되었다. 3대에 이르는 가족과 사돈이 모두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저 하늘에 별이 되었다.



당시 윤희순 선생이 보여주었던 진취적인 독립 정신은 조선의 여성들뿐만 아니라 남성 모두에게 큰 울림이 되었고 수 많은 애국지사들을 이끌어내는데 큰 역할을 다했다. 선생의 뒤를 이어 여성들은 꾸준히 민족의식을 키워나갔고, 민족을 위해 세운 뜻을 꺾지 않고 항일투쟁에 나섰다.



올해 초 국가보훈처 공훈발굴과 서기관님하고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 것이 떠올랐다.

“공훈이 인정되려면 현 보훈법상 ‘뚜렷한 업적’ 이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이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 수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가로 지정되지 못했음은 자명하다. 나는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분들이 여성 독립운동가 분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당시 여성 독립운동가, 이 분들이 총을 들고 적을 사살하지 않았다면 독립운동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독립군 부대, 의열단, 광복군들과 함께 사선을 넘나들며 독립투사들에게 밥을 지어준 어머니들이 있다. 그들의 속옷을 빨래해주고, 함께 대화를 나누고 정신적으로 힘을 주었던 어머니들, 나는 이 분들이 함께 만들어간 역사 역시 독립운동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경험상 빨래, 청소, 밥, 요리 준비 등 가사일을 하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된 일이다. 하물며 목숨을 걸고 수백 명의 가사일을 도울 때 이 분들께서 어떤 마음이셨을지 생각해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이들은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 민족을 위한 뜻을 세워 그 길을 실천한 것이다.



더 늦기 전 올해부터라도 더 많은 여성독립운동가 분들이 발굴되고 재조명되고 독립운동가로 지정되어 최소한의 예우를 우리 후손들이 다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이 글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기도한다. 이제 이 일은 우리의 몫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