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안희제 선생(1885.8.4~1943.8.3)

2024. 8. 4. 13:40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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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안희제 선생(1885.8.4~1943.8.3)

백산상회부터 발해농장까지
독립운동 거점의 설립자


1905년 11월 18일 <을사늑약(乙巳勒約)> 이 체결되었을때 우리나라의 국망은 풍전등화와 같은 시기였습니다. 일본은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우리의 자주적인 외교권한과 통치권한을 장악하였고 결국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조국이 이같이 망국의 위기에 처하자 선생은 새로운 학문을 익힐 뜻을 집안 어른들에게 밝혔습니다.

“국가가 망해 가는데 선비가 어디에 쓰일 것입니까. 고서(古書)를 읽고 실행하지 않으면 도리어 무식자만 같지 못합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학문은 오히려 나라를 해치는 것이니, 내일 당장 경성으로 올라가 세상에 맞는 학문을 하여 국민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 가위 공맹(孔孟)의 도라 할 수 있는데, 어찌 산림간(山林間)에 숨어서 부질없이 글귀만 읽고 있겠습니까”

선생은 서울에서 신학문을 습득하여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 그를 통해 국권회복을 달성하고 싶어했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선생의 신념은 도산 안창호 선생과 매우 유사합니다. 선생은 1905년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하였고,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청소년 교육이 급선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생의 업적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 두드러지는 것이, 첫쨰. 본인도 어려운 상황에서도 빈곤한 학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해주었고, 둘째. 방학 기간동안 순회강연을 통해 계몽운동을 벌이는 등 민족의식의 고취에 노력을 다했으며, 셋째. 잡지 발행을 통해 사립학교 설립에 필요한 교육재원의 확보에도 힘썼다는 점입니다. 결국 선생은 구명학교, 의신학교, 창남학교  3개를 연이어 설립하였고 민족교육과 민중 계몽운동을 실시함으로써 국권회복운동의 역량을 육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영향력있는 독립운동 지도자중 한명으로 성장해온 선생은 결국 대동청년당을 결성하게됩니다.  7세부터 30세 미만의 청년들로 조직한 '대동청년당', 대동청년당은 2가지를 기억하면 됩니다. 첫째로 '신민회' 와 함께 항일 민족의식을 모으고 비밀 작전등을 수행, 둘째로 8.15 해방 때까지도 그 실체가 발각되지 않은 비밀결사 조직. 선생은 창립멤버이자 대동청년당의 2대 단장이었습니다. 선생의 업적은 그 외에도 다양한데, 교육을 통해 힘을 길렀고 발해농장을 설립하여 만주로 이주한 한국 농민들을 정착시켜 자작농으로 육성함으로써 독립투쟁의 인적•물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있었다는 부분을 기억하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