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10. 09:29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가 윤능효(尹能孝) 1882년(고종 19) 3월 18일~1953년 10월 10일
1919년 3‧1운동 지원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노령(露領) 신한촌(新韓村)에 있는 자신의 집에 동지 최봉준‧우덕순‧김치보 등과 재러 한인대표 위원을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파견할 것과 여비로 5만 루블을 거출할 것을 의결하고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모색하였다. 안중근(安重根)의 거사를 지원하기 위해 200원을 지급하였다.
윤능효 선생은 함남 함흥(咸興) 출신으로, 1904년 7월 노령 해삼위(海蔘威)로 망명하여 1907년 노령 신한촌(新韓村)에서 최봉준(崔鳳俊)·우덕순(禹德淳)·김치보(金致甫) 등과 함께 일제의 침략에 대한 격퇴 계획을 수립하고 활동함
선생은 1909년 10월 안중근(安重根)이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주살하기 위하여 하얼빈(哈爾濱)으로 갈 때 그에게 200원을 여비로 지원하였고, 1910년 10월 노령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지도자인 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박은식(朴殷植) 등과 친교를 맺고 독립운동의 방안을 숙의하면서 안중근이 침략원흉 이등박문을 주살한 후 일경에게 피체되자 사재(私財)를 털어 러시아 및 영국인 변호사를 선임하여 그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안중근 의사의 가족과 1911년 3월 통감부의 친일파 고문이었던 미국인 스티븐스를 사살한 전명운(田明雲) 의사 가족들의 생계지원을 지원함
그는 1920년 6월 1일 상해(上海)의 <독립신문(獨立新聞)> 기자이던 이영렬(李英烈)로부터 <임시정부공보(臨時政府公報)>와 문헌 등 선전물 400여 부를 송부받아 국내에 배포하고자 하였으나 일제 헌병대에 압수당하였으며, 동년 9월 미국 워싱턴 소재 친한단체(親韓團體)인 '조선의 우회(友會)' 본부로부터 입회서 용지와 영문 인쇄물이 송부되자 이를 국내에 배포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1923년 10월 중국 동삼성(東三省)에서 일경에 피체되어 온갖 악형을 당하고 약 1년간 옥고를 치른 후 출옥하여 고향 함흥의 누이동생 집으로 이주한 뒤 각지를 전전하면서 교육구국운동에 심혈을 기울임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기 위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 262호에 안장하여 추모하고 있다.
「대전현충원묘적부」「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권 66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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