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자혜 선생 – 여성독립운동가

2024. 10. 10. 09:38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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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자혜 선생 – 여성독립운동가



2009년 7월 15일 충북 청원에서 박자혜의 사후 66년만에 처음으로 추모제가 열렸다. 대한간호협회는 국가보훈처가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박자혜 간호사에 대한 추모식을 개최했다. 이날 오후 1시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묘역에서 열리는 추모식은 박자혜 선생의 숭고한 뜻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마련되었다



이덕남: "이제야 시어머니를 제대로 보는 것 같다. 어머니는 숨겨진 우리의 독립운동사, 그 절반의 그늘이다. "



박자혜 선생은 1895년 경기도 고양군 (지금의 고양시)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궁중 나인으로 생활했다. 나인은 왕과 왕비의 수족을 챙기는 신하로, 환관과 비슷한 개념



선생은 1910년 일제가 한일병탄조약으로 조선 궁중을 없애자 궁녀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선생은1914년 숙명여학교(현 숙명여대)를 입학하여 근대교육을 받았고 기예과를 2회로 졸업한 뒤 조산부(조산사)양성소를 다녔다. 열심히 배우고 익혀 조산사 자격증을 딴 선생은 산부인과에서 약 3년간 간호사로 근무한다.

그러던 선생의 인생을 바꾸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1919년 3.1만세시위혁동. 만세시위혁명에 흥분한 일본인들은 무자비한 폭력으로 대처했고 이로인해 남녀노소 부상자가 끊이질 않았다. 병원으로 들어오는 끊임없는 환자들과, 울음소리 와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병원은 지옥 그 자체였다.

간호사의 입장에서, 의사의 입장에서 천천히 글을 써 내려가다 나는 나도 모르게 몰입이 되었고 상상이 되었다. 대량 환자가 발생하는 참사의 현장, 내가 어릴 적에 발생했던 성수대교 붕괴와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이 떠올랐다. 약 1,445명의 종업원과 고객이 다치거나 죽었던 사건 나의. 외삼촌은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기 1시간 전, 그곳에서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구매하고 나오셨다. 삼촌은 어머니가 전화하지 않았다면 삼풍백화점에 좀 더 오래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자신은 아마 죽었을 거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그때 인근 병원 응급실(ER)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1919년 3월 1일부터 시작된 아비규환은 하루 만에 끝나지 않았다. 매일매일 끊임없는 환자들, 그렇게 3개월. 환자들은 몰려왔고 수용시설은 턱없이 부족했다. 지속적인 아비규환의 연속. 이때 정신 없이 환자들을 치료하던 박자혜 선생은 민족의 참상을 자각하며 가슴속에서 크나큰 항일의식이 피어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선생은 3월 6일 근무를 마친 뒤 간호부들을 옥상에 불러모아 만세혁명에 참여 하자고 제안한다. 조산원과 간호부를 취합하여 독립운동단체 ‘간우회’를 조직한다. 간우회는 간호사들의 동맹파업을 주도하며, 비밀리에 각종 유인물을 배포하여 민족에게 독립의지를 일으켰다. 선생은 만세시위로 부상당한 환자들을 치료해주는 간호사에서 만세시위자가 되었다. 간호사들을 이끌고 ‘간우회’ 이름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한다. 동료가 부상을 당하면 서로 서로 치료해주면서 계속해서 만세시위를 해 나가는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만세시위가 시작되고 9일 뒤, 박자혜 선생은 병원 내 간호사들과, 피부과 의사 김형익(金衡翼) 선생을 포함한 조선 의사들을 규합하였고 나아가 시내 국공립 병원 직원들을 규합하여 태업을 주도했다.



태업이라는 용어가 조금 낯설 수 있는데 태업(怠業)이라 함은 노동조합의 통제아래 표면적으로는 취업(就業)을 하면서도 집단적으로 작업 능률을 저하시키고 소극적 작업을 함으로써 사용자에게 손해를 주는 쟁의행위를 말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중간에 밀정에 의해 일경에 알려져 수포로 돌아갔고 선생은 체포된다.



당시 경찰 보고서에 따르면 ‘악질적이고 포악한 여자’ 라고 기록할 만큼 당당하고 거세게 항의를 했던 것 같다. 잔혹한 고문을 당한 뒤 선생은 풀려났고 당시 함께 독립운동에 가담한 간호사, 의사들이 병원에서 사직을 당했고 선생은 독립 운동가들이 주로 활동했던 중국 베이징으로 떠난다.



박자혜 선생은 중국 망명길에 북경의 연변대 의예과에 입학한다. 간호사에서 의사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의학 공부를 하며 선생은 여성 축구팀을 조직하고 축구팀 주장을 역임한다.



박자혜 선생은 참 시대를 앞서갔던 신 여성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어머니 시절 (56년생)만 하더라도 상고만 졸업해도 매우 학력이 높았던 시절인데 1920년도에 3.1운동에 참여 후 간호사에 의대입학에 여성 축구팀 주장이라니…… 쉽게 비교대상이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는다.



워낙 당차고 활달한 성격이었던 선생. 북경 생활이 1년째가 되던 1920년, 선생은 한 남자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는다. 이 남자의 이름은 단재 신채호.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  – 신채호



나는 왜 이 대목을 쓰면서 감탄사와 함께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일까? 서로가 같은 길을 향해 간다는 것, 그것만큼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



우당 이회영 선생의 부인 이은숙 여사의 중매로 둘은 만났다. 1921년 아들 수범을 낳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애국지사들의 독립을 지원한다 여타 독립운동가들이 그러하듯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부부는 생활고에 시달렸고 결국 신채호 선생은 부인 박자혜 선생을 1922년 경성으로 되돌려 보낸다. 1920년도에 결혼할 걸 계산해보면 결혼 2년차가 채 안 되는 ‘신혼’ 상태였다는 말인데 선생의 마음이 오죽했을까?



베이징에서 2년간 짧은 신혼생활을 보낸 뒤 귀국한 선생은 지인의 도움을 받아 서울 종로구 인사동 69번지에서 ' 산파 박자혜 ' 라는 간판을 내걸고 수범, 두범 두 아들과 함께 살면서 신채호가 보낸 항일열사들의 독립운동을 목숨 걸고 도왔다. 박자혜는 베이징, 텐진 일대의 독립운동가와 국내 인사의 연락 임무를 맡았는데, 부엌도 마루도 없는 방을 전전 근근하며 살았다.



선생의 수입은 매우 적었다. 당시 조산원 개업의 수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던 시기였고 조선 여성들은 난산일 경우에만 산파를 찾았으며 순산을 하면 외부인을 집안으로 들여서는 안 되는 미신이 있었고 상해와 국내를 오고 가는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신채호 선생이 일경에 잡혀 투옥 됐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박자혜 선생은 후원금을 모금해 신채호 선생의 옥바라지에 모든 돈을 썼다.



1926년 12월 28일 오후 2시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한 조선 청년이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일경과 동양척식회사 직원을 비롯해 7명을 살상시킨 사건이 발생했다.



동양척식회사는 일제가 조선 및 대만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하고 경제적인 이득을 착취하기 위하여 설립한 회사이다. 과거 인도를 식민화하던 영국의 동인도회사와 비슷하다.



그러나 동양척식회사가 토지 매입 및 국유지를 강제적으로 빼앗아 친일파와 일본인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서 민족 내의 분열과 갈등을 심화시켰다는 점과 대다수의 조선 농민들이 농토를 강탈하여 대부분 생활고에 시달리고 북간도, 만주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는 점은 참으로 간악하다 할 수 있다.



나석주 의사는 바로 이 곳에 폭탄을 던진 것이다. 선생은 의열단원이었다. 이 사건은 조선 백성들의 마음 속 한을 씻겨주는 사건이었다. 무장투쟁사에서 손 꼽는 명장면을 만들어낸 나석주 의사 뒤에 박자혜 선생이 있었다. 박자혜 선생은 황해도 출신이고 서울 방문이 처음인 나석주 의사에게 지리를 직접 알려주며 거사를 도왔다. 당시 박자혜 선생은 일제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감시 받고 있었고 여러 번이나 이유불문 연행되어 조사를 받는 등 잠시 몸을 사려야 하는 시기였다.



나석주 의사는 백범 김구 선생의 안악 양산학교 제자이다. 나석주 의사가 천진에서 중국군 장교로 복무하고 있을 때 김창숙, 김구, 이동녕 선생 등 민족 지도자들은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폭탄투척거사 계획을 세웠다. 이 때 김구 선생 나석주 의사를 그 실행자로 추천하였다. 나석주 의사는 신채호 선생으로부터 폭탄 2개를 받고 독립운동가 유자명, 한봉근, 이승춘 선생등과 함께 입국하여 거사하려 했으나 자금 부족으로 혼자 실행에 옮겼다.



정말이니 눈물 겨운 상황이었다. 단재 신채호.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이자 학자였던 선생의 말년은 너무나 비참했다. 아내 박자혜 선생 역시 찢어질 듯 궁핍한 상황 속에서 남편의 옥바라지만 7년간 하며 삶 전체를 바쳤다.



신채호 선생은 1929년 5월 치안유지법 위반과 유가증권 위조 등의 혐의로 징역 10년형의 언도를 받고 뤼순감옥(旅顺监狱 여순감옥) 에 수감된다.

독방속에 갖힌 신채호 선생은 너무 추워 박자혜 선생에게 솜을 많이 누빈 두툼한 옷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생계를 유지하는 것도 너무 어려워해 주지 못했다  



박자혜 선생은 매달 육원오십전 하는 방 한 칸의 월세마저도 제때 못 내어 주인의 독촉을 받으면서 살았다. 산파업이 제대로 안 되어 박자혜 선생은 아들과 함께 풀장사, 종로네거리에서 참외장사를 하기도 하였다.



신채호 선생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동아일보에서는 박자혜선생의 생활을 공개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러한 내용의 기사가 실리자 전국에서 이들을 위해 후원금을 보내왔다. 무명씨 1원, 10원, 강계 동인의원 김지영 10원, 이천군 박길환 5원, 정주군 이승훈 5원 등이었다. 1929년에도 천도교부녀회에서 7원을 동정금으로 보냈다.

이러한 어려운 생활을 더욱 괴롭히는 것은 일경들의 감시와 폭력이었다. 큰 아들 수범이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서면 일경이 책가방을 뒤져 검색을 했다. 혹시라도 어린 수범을 시켜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어떤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박자혜 선생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 신문사와 신간회, 조선어학회 등을 자주 방문하였으며, 큰 아들 수범의 학비를 위해 신채호 선생의 동지, 친지, 친척 등을 찾아 가기도 했다. 박자혜 선생은 일경에게 갖은 욕과 폭력을 당하는 굴욕을 겪기도 하였다. 큰 아들 수범은 일경의 간섭으로 선린상고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1935년 건강이 악화되어 조기 출감이 가능할 때, 신채호 선생은 선생의 보증인이 친일파라는 이유로 가석방을 거절한다. 1936년 2월 18일 뤼순 감옥 독방에 갇혀있던 선생은 뇌일혈로 쓰러졌으나 그대로 방치되었고 4일 뒤 2월 21일 뇌일혈, 동상, 영양실조, 고문 후유증으로 홀로 독방 속에서 사망하였다.



1936년 2월 21일 그날도 평소와 같은 하늘이었다. 박자혜 선생은 열심히 일하고 또 일하며 돈을 모아 남편을 보러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남편의 사망소식을 전달 받았을 때 박자혜 선생은 얼마나 가슴이 메어졌을까



비단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감정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민족의 지도자이자 학자였던 조국의 별이 하나 지는 일이었고, 수 십 년간 조국의 독립을 함께 꿈꾸며 ‘이겨낼 수 있다. 조국의 독립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념을 함께 대화했던 인생의 동반자를 잃었다. 신체 일부가 잘려나가는 아픔이 아니었을까?



박자혜 선생은 신채호 선생의 사망 소식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이제 모든 희망이 아주 끊어지고 말았다.” 이들이 얼마나 독립운동에 전념했는지, 둘째 아들 두범은 영양실조로 1942년 사망하고 만다. 조국과 남편, 아들을 잃어버린 박자혜 선생은 잦은 연행으로 몸이 상하게 된고 신채호 선생이 서거 후 7년간 홀로 셋방살이를 하다 1944년 10월 10일 광복을 10개월 남긴 때 세상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