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29. 09:37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가 강우규 선생(1855.7.14~1920.11.29)
노익장을 보여준 민족의 교육자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조선의 청년들에게 남긴 유언-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서울 남대문 역. 조선 제 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열차에서 내려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누군가가 던진 폭탄이 터집니다. 폭탄은 사이토 마코토 신임 총독의 목숨을 겨냥했고 약 36명이 현장에서 즉사합니다. 약 보름뒤 검거된 폭탄 투척자는 놀랍게도 65세의 노인이었는데 도대체 그는 누구이며 왜 폭탄을 던진 것일까요?
강우규 선생은 우리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후 만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인술(仁術)을 베풀면서 읍내 남문 앞 중심지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며 상당한 재산을 모았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선생은 교육 계몽운동을 펼쳤는데 읍내에 사립학교와 교회를 세워 새로운 학문을 전파하고 젊은이들에게 끊임없이 민족의식을 가르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선생의 계몽운동 활동 시작은 을사늑약으로 인한 국망의 위기감이 가장 큰 이유였는데 결국 국운은 계속 기울더니 급기야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선생은 50대 초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심하고였, 1911년 봄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지역으로 향했습니다.
100년전 50대의 나이는 오늘날 70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곳에서 선생은 끊임없이 학교를 세우고 교편을 잡아 젊은이들에게 민족정신을 가르쳤습니다. 선생은 3•1운동 소식이 신흥촌에 알려진 1919년 3월 4일 동포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앞장선 뒤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이동휘 선생의 부친 이승교 박은식 선생 등이 결성한 노인동맹단에 가입했습니다. 노인동맹단은 46∼70세 남녀로 구성된 매우 특이한 독립운동단체였는데 독립운동 1세대에 해당하는 본인들에게 조국의 운명에 대한 책임이있다고 느끼는 '어른'들이었습니다.
명부에 기록돼 있는 회원만 2천여 명으로 학계에서는 1919년 6월 당시 5천 명 정도가 가입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노인동맹단은 파리 강회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외교적인 활동에 주력했고, 일부 강경파는 노인단 대표를 경성에 파견해 보신각에서 시민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한 뒤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강우규 선생은 노인동맹단을 대표해 조선총독을 처단하기로 하고 러시아에서 폭탄을 구입했으며, 원산을 거쳐 8월 초 서울에 들어온 뒤 의거를 감행했다.
선생의 폭탄 투척은 3.1운동 이후 최초의 의열 투쟁이란 점에서 의미가 큰데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안중근 의사가 당시 30살, 윤봉길 의사 24살, 이봉창 의사 32살이었던 점을 생각해보면 65세 노인인 강우규 선생이 삼엄한 경비를 뚫고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던진 폭탄은 그 자체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할 수 있겠습니다.
독립을 위한 용감한 선택, 그리고 조선의 교육을 위한 용감한 선택
"내가 자나 꺠나 잊을 수 없는건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까지 광동중학을 비롯 여섯 개의 학교를 세우며 민족교육에 헌신했던 선생의 마지막 애국..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1920년 11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마지막까지 외쳤던 한마디
"조선청년들이여, 깨어나라"
청년들의 교육을 생각한 독립운동가 강우규 선생,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던 날에도 선생의 기개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선생은 감상이 어떠냐는 일제 검사의 물음에 짤막한 시를 남기고 의연히 순국하였습니다.
유언 단두대상 유재춘풍(斷頭臺上 猶在春風) / 유신무국 기무감상(有身無國 豈無感想 )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겠는가
선생의 사이토 총독 폭탄 의거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가 있습니다.
첫째,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사 특히 무장투쟁 노선의 첫 시작.
3•1 만세 운동을 전개하며 일제 군경에 저항하다 희생된 많은 독립운동가가 있었지만, 최고 식민지 통치자의 처단을 목표로 한 의열투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생은 처음부터 새로 부임하는 식민지 최고 통치자인 조선 총독을 목표로 의거를 계획하여 준비한 뒤, 사전 답사까지 거쳐 의거를 결행하였고 성공하였습니다. 의열투쟁의 본질이 그것을 통해 조국독립의 뜻을 일제와 세계에 전달하려는데 있다고 본다면, 선생의 의거와 그 후의 재판 과정을 통해 우리 동포와 민족에게, 그리고 일제와 국제사회에 충분한 메세지를 주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의거는 성공한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평가하고 있으며 이러한 의열투쟁 방식의 독립운동노선은 이후 약산 김원봉 선생의 의열단과 백범 김구 선생의 한인애국단 등으로 선생의 의지가 이어지게 됩니다.
둘째, 독립운동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노인에 의한 폭탄 투척 의거라는 점이다. 선생이 의거를 결행한 나이는 66세였습니다. 100년전 66세면 오늘날 몇세에 해당할까요? 이러한 나이에 조국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결심하고 선두에 나서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거사는 젊고 열정적인 청년들에 이루어진점을 보아 선생의 의거는 수많은 동포들에게 큰 울림을 선사했음이 분명합니다. 선생의 거사 후 수많은 비밀결사대의 창설과 의열단 결성등을 보면 우리나라의 청장년들이 큰 자극을 받아 독립운동 전선에 뛰어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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