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오동진 선생(1889~1944.12.1)

2024. 12. 1. 10:24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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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오동진 선생(1889~1944.12.1)

조국 독립을 위한 무장항쟁에 생애를 바친 불굴의 투사


오동진 선생은 1927년까지 부하 14,149명을 지휘하면서, 일제관공서 습격 143회•일제관리 살상 149명•밀정 등 살상 765명이라는 당시 평북경찰부의 통계가 말해주듯 평생을 항일무장투쟁으로 일관해온 무장항쟁의 전설적인 독립운동가 중 한 명입니다.

선생은 독립운동가 양기탁 선생과 함께 당시 너무나 다양한 노선을 지향하던 독립운동 단체 및 지방자치단체를 전부 규합하여 통일회의를 개최하였고, 정의부를 조직했습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참.정.신 이라고 외우는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에서 '정의부'를 말합니다.

정의부는 입법•행정•사법기관을 두었으며, 직할 부대로 '정의부 의용군'을 두었는데 이 직할부대의 사령관이 바로 지청천 장군이었습니다. 총 8개 중대에 7백여 명의 병력이 주둔해있었고 많은 전투를 통해 적지 않은 전과를 올렸습니다.

1926년 3월 3일. 오동진 선생은 전장에서 뛰어난 공적을 이루면서도 좌익과 우익의 세력을 통합한 독립운동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렇게해서 만들어진 당이 고려혁명당이었습니다.  당시 고려혁명당의 당원 수는 무려 1500명에 이르렀고 선생은 정의부 군사위원장으로 총사령관을 겸임했습니다.

이 무렵 선생의 옛 동지 김종원(金宗源)이 선생에게 독립운동 후원금 및 군자금을 지원해줄 투자자를 찾았다며 당시 금광을 소유하고있던 사람이 만나고 싶어한다고 말했고 오동진 선생은 옛 동지였던 김종원을 믿고 약속 장소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역시 우리의 예상은 벗어나질 않는군요. 일제의 앞잡이로 이미 변해 버렸던 밀정 김종원의 밀고로 당시 신의주 지역에 악질 고등형사인 김덕기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선생은 일본의 재판을 거부하였고, 1929년 11월 11일부터 33일 동안 단식을 하기 시작했고 1932년 3월 5일 강제로 재판정에 서게 되었는데 광기가 발작했다는 억지 이유로 퇴장당한 채 일본검사로부터 무기징역을 구형받게됩니다. 3월 9일 신의주 지방법원에서도 동일한 이유로 같은 형이 선고되자 더이상의 공소가 의미없을 깨닫게 됩니다. 당시 장기복역수를 수용하던 경성형무소로 이감된 선생은 1934년 6월 11일부터 48일간의 제2차 단식을 벌였는데 7년간의 형무소생활과 고문으로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선생이 2차 단식에 들어가자 모두들 선생의 정신력에 경이로움을 표시했으며, 당시 일본인 형무소장조차 선생과 면담을 할 때에는 경례를하고 예를 갖추었다는 일본측의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미친 일본인 의사가 오동진 선생에게 ‘형무소 정신병’이라는 듣도보지도 못한 병명을 붙이는 바람에 선생은 1944년 정신질환자들이 수용되는 공주형무소로 강제 이감되었고, 그 해 12월 1일 옥중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어디에서도 빛을 발휘한다.. 오동진 선생같은분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