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기산도 (奇山度, 1869년∼1926년 미상)

2024. 12. 4. 09:45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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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기산도 (奇山度, 1869년∼1926년 미상)



[요약]

일찍이 기독교계학교의 교사를 지냈으며, 한국의 식민지화의 주구(走狗)를 살해하여 식민지화를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소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이것을 '을사오적단'이라고 부른다. 독립운동사에서 초기 의열투쟁을 논할 때 거의 첫 단추로 언급되는 단체지만, 교과서 등에 언급되지 않아 아는사람이 거의없다.
1905년(광무 9) 11월 박종섭(朴宗燮)·박경하(朴敬夏)·안한주(安漢朱)·이종대(李鍾大) 등과 저격무기를 구입한 뒤, 손성원(孫聖元)·박용현(朴鎔鉉)·김필현(金弼鉉)·이태화(李太華) 등을 파견, 적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그러나 경무고문 마루야마[丸山重俊]의 부하가 결사대본부인 한성모(韓聖模)의 집을 습격하여 박종섭·박경하·안한주·이종대와 함께 붙잡혔다. 출옥한 뒤 부상한 다리를 이끌고 일생을 유랑하였다.


[보다 자세한 이야기]



기산도 의사의 파란만장한 생애



기산도는 1878년 10월 16일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하남리에서  기정진(奇正鎭),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성재(省齋) , 기삼연(奇參衍) 의병장 등을 배출한 행주 기씨 집안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부터 글을 깨치고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다.



16세 때 구례 연곡사에서 일본군과 항전하다가 전사, 순국한 고광순(高光洵) 의병장의 사위가 되었다. 기독교 학교의 교사를 지내기도 한 기산도는 고향 장성에다 자강회(自彊會)를 조직하여 인재를 모아 양성하며 그들에게 무력 투쟁의 투지와 정신력을 길렀다.



1904년, 기기 박관호 등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켜 장성 광주간 고개에서 일병과 싸워 일병 수명을 죽이고 우리 측도 세 명이나 잃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기산도는 상경하여 이범석 서상규 동지들과 매국원흉 암살단을 조직하였으나 거사를 앞두고 일 헌병에게 발각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고도 발설치 않아 일 개월 만에 무혐의로 풀려났다.



1906년 2월 16일, 구완희, 이세진 동지와 함께 을사오적의 한 사람인 군부대신 이근택 집을 밤 12시 무렵 습격하였다. 이날 이근택은 오후 7시경에 퇴궐한 뒤 8시 무렵에 손님 6명의 방문을 받고 이들과 대화를 나눈 뒤 11시 무렵에 침실로 들어갔다.



그의 첩은 옆에서 국문 잡기(國文雜記)를 읽고 있었다. 이때 기산도 일행 셋이 들어와 한 명은 이근택의 팔을 손으로 잡고 다른 한 명이 칼로 찔렀다. 이근택이 이때 재빨리 방안의 촛불을 끄자 일행은 칼로 이근택의 머리에서부터 어깨와 등 10여 곳을 마구 찔렀으나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하였다.



이근택과 첩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하인이 달려오자 일행은 역시 칼로 하인의 배와 얼굴, 다리 등 4곳을 찔렀다. 이어서 집안을 경비하던 병정 6명과 순검 4명이 달려왔다. 일본 헌병과 순사도 이근택의 집에 설치한 경종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그러나 기산도 일행은 이미 남쪽 담에 설치해 놓은 밧줄을 타고 탈출한 뒤였다. <대한매일신보>에는 다음과 같이 이 사건을 보도하였다.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씨가 재작일 하오 12시경 그의 별실(別室)과 함께 막 옷을 벗고 취침하려 할 무렵에, 갑자기 양복을 입은 누구인지 모르는 3명이 칼을 들고 돌입(突入)하여, 가슴과 등 여러 곳을 난자(亂刺)하여 중상을 입고 땅에 혼절(昏絶)한 바, 그의 집 청직(廳直)이 김가(金哥)가 내실에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괴이히 여겨 탐문하고자 하니, 갑자기 양복 입은 3명이 안에서 급히 나와 놀라 누구냐 하고 물은 즉, 이들이 역시 칼로 김가를 타격하여 귀와 어깨에 부상을 입히고, 곧바로 도망갔다. 이 군부대신은 한성병원에서 치료중이나 부상이 극중(極重)하여, 위험(危險)이 팔구분(八九分)이라더라.



- 대한매일신보 1906년 2월 18일, ‘이씨 봉자(李氏逢刺; 이씨 자객을 만나다)’




떠돌이 거지 지사 기산도



기산도 등은 계획된 일을 무사히 마친 뒤 인적이 끊어진 골목으로 사라졌다. 이들이 사라진 뒤 곧 이근택의 집은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경호를 책임진 한국군경을 비롯한 일본 헌병대 및 순사들이 즉각 출동하였으나, 그들은 13곳을 난자당한 채 널브러져 있는 이근택과 실신한 첩만 보았을 뿐이다.



기산도를 비롯한 범인들은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현장에 기산도가 떨어트린 가발이 단서가 되어 결국 체포되었다. 이근택은 한 달 이상 한성병원의 특실에서 치료를 받은 뒤 퇴원하여 기산도를 신문하였다.



이때 기산도는, “너희 오적(五賊)을 죽이려는 이가 어찌 나 한사람뿐이겠느냐. 단지 나는 너를 죽이려던 것이 서툴러 탄로 나게 된 것만이 한스럽다”라고 대답하며, 자신의 의지를 당당하게 펼쳤다고 한다.



기산도는 2년 반의 징역형을 받았다. 당시 재판장은 이완용의 이복형 이윤용이었다. 출옥한 뒤에 그는 의병 전선에 뛰어들었다. 유생에서 계몽운동으로, 의열투쟁에서 다시 의병 항쟁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그는 고향 전남 장성으로 돌아와 재종조부인 의병장 기삼연의 뒤를 이어 의병투쟁에 나섰다.



1916년에는 일본 헌병 감시자를 따돌리고, 고흥군 도화면에 있는 친척 기하요(奇夏堯)씨를 찾아와 당오리를 은거지로 낮에는 머슴살이하고, 밤에는 사랑방에 서당을 열어 인재 양성에 힘써며 이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19년 3·1운동 뒤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고자 제자 박길용, 기동환을 데리고 진남포로 가다가 일제의 삼엄한 감시로 상해에 가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무렵 일본군 보조(밀정)가 당오리로 기습하여 기산도를 사장나무에 묶어놓고 매질로 실신시킨 뒤 날이 밝으면 경찰서로 압송키로 하였으나 이 마을에 사는 김봉순 할머니가 부엌칼을 감추고 어둑새벽에 물 길어가는 척 하고 결박한 포승줄을 잘라 도피케 하였다.



1920년에는 제자 박길용의 누이 박순임과 재혼한 뒤, 숨어 지내다가 일본 헌병 야우다(矢羽田)에게 발각 체포되고 기산도의 옷에서 기밀문서(연판장)가 나와 고흥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일경이 기산도에게 고진 고문을 하며 이를 추궁해도 자백치 않자 광주형무소로 이감하여 다시 가혹한 고문을 하자 “개 같은 너희에게 어찌 자백하랴”하고, 스스로 혀를 깨물어 잘랐다.



1925년, 5년의 옥고를 치른 뒤 출감하여 고흥 당오리에서 장흥으로 피신한 처 박순임의 도움으로 반신불수가 된 몸을 추스르며 떠돌이로 살다가 1928년 51세로 운명하면서 “유리언걸지사 기산도지묘(流離焉乞之士 奇山度之墓)”란 나무 비 하나만 세워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1963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1967년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고광순 따님과 같이 쌍분으로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