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1881.1.29~1950.12.10)

2024. 12. 10. 10:00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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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1881.1.29~1950.12.10)

언어의 천재였던 탁월한 정치인, 상해 임시정부 부주석

본래 우리의 독립은 평화회의나 모종의 유력한 단체로부터 승인을 받던지, 첩지(帖紙)를 내어 주듯 할 것이 아니오. 우리의 최고기관으로부터 각 단체 또는 전 민족의 합심과 준비 여하에 달렸나니, 이것이 있으면 우리에게 독립이 있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파멸이 있을 따름이오  -상해 연설 中


김규식 선생은 독립운동사 전체를 통틀어 그 누구보다 현실을 냉철히 바라봤던 당대의 엘리트 석학으로 손꼽힙니다. 기록에 따르면 8개 국어를 유창하게 회화할 수 있었던 어학의 천재였으며,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미국 유학시절에는 러일전쟁과 일본의 승리를 미리 예견하였고 연세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다 언더우드의 비서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천재이자 역사에 이름을 남긴 선생의 유년시절은 슬프다 못해 매우 비참했습니다.


선생이 그토록 냉정하게 세상을 바라봤고 공부에 전념하였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가난했던 삼촌들은 2~3살이던 아이가 굶주림으로 인해 영양실조와 열병이 걸려 죽기직전까지 갔을때도 뒷방에 눕히고 병풍을 쳐놓았다고 합니다. 당시 언더우드 목사는 아이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있다는 소문을 듣고 강원도까지 찾아가 분유와 약을 들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갔는데 너무 굶주렸던 아이가 먹을 것을 달라며 울면서 벽지를 뜯어먹고 있었다 합니다. 이 모습을 본 언더우드 목사는 그 아이를 자신의 고아원으로 데려가는데 이 아이가 바로 김규식 선생입니다. 언더우드 고아원에서 영어,수학,라틴어,신학, 과학을 배운 선생은 시간이 지날수록 총명해졌고 짓궂은 아이들과 부모없는 자식이라 차별하는 냉담한 현실과 어른들 속에서 점점 냉철하고 현실적인 인물로 변해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독립운동사에 큰 별이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일제는 식민통치체제의 안정을 위하여 민족운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1910년 12월 황해도 지역 민족운동자 탄압에 이용된 안악사건이었고, 이듬해 신민회 민족운동자들을 겨냥한 ‘데라우치총독 암살 음모 조작 사건’이었습니다. 안악사건을 빌미로 일제는 김구 선생을 체포하였으며 데라우치 암살 사건을 빌미로 105명의 신민회 민족운동자들을 불법 체포하였는데 이 때문에 국내의 독립운동 기반이 붕괴되었고, 많은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해외로 망명하게된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김규식 선생 또한 이때 해외로 망명하였는데, 호주로 유학을 간다 속인후 중국 상해에 도착하여 신채호, 조소앙, 박은식 선생등과 함께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민족정신을 젊은이들에게 교육했습니다.


선생은 박달학원의 영어 교수직을 맡았는데 당시 김성(金成)이라는 가명으로 1917년 7월 신규식, 조소앙, 박은식 등과 함께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여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단결을 통한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의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이 시기에 국제 정세는 크게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즉 제1차 세계대전의 과정에서 폭압적이고 착취적인 식민주의, 제국주의는, 정의와 평화를 주창하는 인도주의와 민족주의의 도전을 받게 된 것입니다.


1918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민족자결주의’를 세상에 공표하자, 상해의 독립운동가들과 애국지사들은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독립운동을 일으킵니다.


그리하여 같은 해 8월 여운형, 조소앙 선생등은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여 갔고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민족대표를 파견하였는데 이때 영어와 불어에 가장 능통한 사람이 김규식 선생이었습니다. 당시 독립운동가 김순애 선생과 결혼한 직후였음에도 기꺼이 파리를 향해 출발하였는데 2월 1일 출발하여 3월 13일에 파리에 도착했습니다. 파리에 도착한 후 선생이 처음 들은 소식은 우리나라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가슴벅차고 눈물나는 순간이었겠습니까.


김규식 선생은 파리 샤토당가에 한국대표관을 개설하고 본격적인 독립 외교활동에 들어갔으며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선생은 외무 총장 (오늘날 외교부장관) 겸 강화회의 파리 대표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선생은 파리위원부에 통신국을 병설하고 회보를 발간하여 각국 대표들과 언론사 및 주요기관에 배포함으로써, 3.1운동 등 한국 독립운동에 관한 소식을 세계 만방에 알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화회의에  <일본으로부터 해방 및 독립국가로서 한국의 재편성을 위한 한국 국민과 민족의 주장> 이라는 공고서와 비망록을 제출하였습니다.

여기서 선생은 역사적 사례와 국제관계, 국제법 등을 활용하여 일제의 침략행위를 비판하고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여 갔습니다. 열강들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한국 문제는 상정되지 못하였지만, 선생의 독립 외교활동은 파리강화회의가 끝난 뒤까지도 이어졌습니다. 즉 선생은 [한국의 독립과 평화]라는 책자를 발간하고, 각국 대표들을 방문하여 3․1운동 이후의 국내 상황을 전하며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한국 독립의 중요성을 설파해간 것입니다. 그후, 선생은 제국열강을 향한 호소를 포기하고 피압박 국가간의 연합을 택했으며, 중국의 항일운동 세력과 연합을 모색했습니다. 또한, 조소앙, 김원봉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창당했고 임시정부의 부주석으로 주석 김구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이끌었습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선생은 신국가 건설의 기초를 마련하는데 힘썼으며 특히 남북 양쪽에서 단독정부의 수립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이를 막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김구선생과 같이 민족분단으로 치닫고 있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기 위해 1948년 4월 북행하여 남북협상에 참석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모두에서 단독정부가 수립되어 민족분단 상황을 맞이하자, 선생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우려하였는데 역시나 1950년 6월 25일, 선생이 그토록 우려하던 일이 결국 벌어졌고, 그 와중에서 선생은 납북되어 같은 해 12월 10일, 평북 만포진 부근에서 권력을 독점하려했던 김일성에의해 숙청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