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이윤재 선생(1888.12.24~1943.12.8)

2024. 12. 8. 15:29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728x90

독립운동가 이윤재 선생(1888.12.24~1943.12.8)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중 순국한 국어학자이자 역사학자.


독립운동가들을 우리가 구분할때 무력투쟁가, 교육투쟁가 등으로 크게 나눕니다. 교육 투쟁가에는 학교를 설립하거나 교편을 잡고 젊은이들에게 민족정신을 가르치는 애국지사들을 의미하는데 이 중에서도 우리의 역사와 한글을 중요시하여 이 분야에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대표적인 분이 주시경 선생, 이윤재 선생같은 분들입니다. 이윤재 선생은 우리의 말과 글, 그리고 역사를 중요시한 숨겨진 독립운동가입니다.

1904년 2월. 일제는 러시아와의 세력다툼 끝에 러일전쟁을 일으켰고 1905년이되자 을사늑약을 강제로 진행시켜 외교권을 빼앗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선생은 외세에 대항할 민족의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일이 벌어진 것이다라고 판단하여 민족교육운동에 전념하기 시작합니다.

선생은 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08년부터 김해 지역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하였는데 교편을 잡으면서 고등교육과정을 대구에서 동시에 이수했습니다. 이곳에서 고등교육을 받으며 우리의 역사, 우리의 말과 글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 분야에 권위자인 주시경 선생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됩니다. 약 5년간 주시경 선생밑에서 연구를 하다가 마산지역에 있는 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게됩니다. 창신학교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큰 학교인데 의열단 단장으로 활약한 김원봉 선생의 고모부가 민족교육을 위해 설립한 사립학교였으며 실제로 김원봉 선생과 조선어학회 회장을 역임한 이극로 선생이 교편을 잡고 가르치던 곳이었습니다. 이윤재 선생은 조선어를 가르쳤으며 일제가 우리의 역사 교육을 금지시켰을때도 수시로 우리 역사를 교육하여 대한의 젊은이들과 청년들에게 민족 정체성과 독립정신에 불꽃을 일으켰습니다.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즉시 운동에 참여했으며 평안도 영변지역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앞장서 주도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선생은 현장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고 갖은 고문을 받은 뒤 1년 6개월간의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출옥 후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그곳에서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던 민족주의 역사학자 신채호 선생을 만나 큰 영향을 받게 됩니다.

선생은 신채호 선생을 만난 뒤 북경대 사학과에 입학하였고 3년간 근대의 역사를 수학한뒤, 민족의 주체는 민중이며 민중이 직접 혁명에 뛰어들어야한다는 철학으로 많은 글을 게재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기관지 <동광>에 쾌걸 안용복을 발표한 것이 유명한데, 조선 숙종때 일본 어민들을 물리치고 울릉도와 독도를 사수한 안용복의 활약상을 소개한 이 글을 통해 선생이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1927년이 됩니다. 선생은 우리나라에 우리나라 말로 된 사전이 어쨰서 한 권도 없냐며 이를 부끄럽고 안타깝게 여겼고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하여 사전 편찬 작업을 시작합니다. 조선어연구회에 대해 조금 자세히 살펴보자면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완전히 식민지가 되었을때 식민교육이 확산되고 본격화됨에 따라 우리의 역사, 말, 글에 대한 연구와 보급이 완전히 끊겨버렸고 이때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주시경 선생입니다.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은 선생의 의지를 이어받아 1921년에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였고 그 의지가 이윤재 선생에게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우리말의 정확한 법리(法理)를 연구함’을 목적으로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말과 글의 보급을 통해 민족독립을 달성하는 기관이었습니다.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한 이극로 선생과 이윤재 선생의 활약으로 조선어학회는 전성기를 이루게 됩니다.

“말은 민족의 단위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이고, 말의 단위가 곧 민족의 단위이므로 조선말이 곧 조선 겨레이다" 이러한 교육신념으로 1929년 10월 각계의 저명 인사 108명이 모여 역사적인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이곳에서 선생은 3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세종과 훈민정음], <별건곤>에 [세종성대의 문화] 를 발표하였으며 1928년에는 선생이 직접 잡지 <한빛>을 창간하기도 합니다.

1933년 10월 드디어 우리말로 된 첫 사전이 조선어학회에서 완성됩니다.
이윤재 선생을 비롯한 18명의 작성위원들이 심열을 기울여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 발표하였는데 이때 이 작업을 함께한 교육지도자들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고 선생또한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온갖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출옥 이후 다시 사전 편찬에 매진하였고 1940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발표하였는데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인 황제의 시민화 정책에 정면으로 충돌하여 조선어학회 교육자 전부 체포가 되는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생합니다. 우리말과 글을 사용 못하게 하고 일본어를 사용하게 하는 일본의 정책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선생의 활동은 일제에겐 용납이 되지 않았습니다.

일제는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사전 편찬 후원 회원들까지 전부 검거하였으며 사전 편찬 원고와 수십만 장의 한글 자료 자료를 압수하였고 조선어학회를 강제 해산시켜버립니다다. 이후 조선어학회 회원들에 대한 1년여간 고문과 취조를 번갈아가며 받게되었는데, 일제는 다음과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민족운동의 한 가지 형태로서 소위 어문운동은 민족 고유의 어문의 정리, 통일, 보급을 도모하는 하나의 민족운동인 동시에 가장 심모원려(深謀遠慮)를 포함한 민족 독립운동의 점진형태(漸進形態)다” 이에 따라 치안유지법 제1조 내란죄가 적용된다

일제는 본보기로 조선어학회 관련 인사들에게 고문의 별명인 ‘육전’ ‘해전’ ‘공중전’이라고 불리는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가하였고 특히 이윤재 선생에게 심각한 고문을 행했는데 그 이유가 선생이 과거 3.1만세시위 운동에 참여했고 민족주의 사학자 출신에 우리말 사전 편찬에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선생은 일제의 잔혹한 고문을 받다 광복을 눈앞에 둔 1943년 12월 8일 새벽, 차가운 시멘트 독방에서 55세의 나이로 순국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