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문양목 선생(1869.6.7~1940.12.25)

2024. 12. 25. 11:03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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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문양목 선생(1869.6.7~1940.12.25)

동학혁명군 출신, 미국에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뛰어들다

산지조종 태백산은 선왕조의 발상지라/산이던지 물이라도 선조유업이 아닌가/ 박산아 물어보자 고금 역사 네 알리라/대한민족의 영웅호걸 누구누구 왔다 갔나/ 태산같이 뜻을 세워 사욕탐심에 요동마라(…)강식약육 험한 시대 청년들아 전진하라/ (후렴)내나도 네나도 네나도 내나/네나도 내나 단군의 자손    -선생의 시 <산지조종 태백산>



문양목 선생은 처음 이름을 들어보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문양목 선생의 조상은 목화씨를 가져온 바로 그 문익점 선생으로서 당시 탐관오리와 무능력해진 정부로 인해 고통받는 국민들을 대변하고자 동학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이 당시에 선생의 아내 역시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였고 전투 중 사망하였습니다.

선생은 남은 삶을 조국을 위해 바치기로 결심한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을 하며 독립군자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선생은 동학농민운동 출신들과 함께 국권회복을 목표로한 '대동보국회'를 결성하였고 회장직에 선임됩니다. 대동보국회에서는 <대동공보> 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였는데 이는 국내외 동포들을 대상으로 국권회복의식을 고취시키는 강력한 항일운동지였습니다.

1908년 3월, 당시 대한제국 외교고문이었던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의 한국침략은 정당하다는 발언을 하였고 이 발언을 신문에 실어 내보냈습니다. 문양목 선생이 운영하던 대동보국회와 당시 한인들로 이루어진 수많은 독립운동단체는 이 미친자의 망언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였습니다. 결국 '공립협회' 와 '대동보국회'는 4명의 특사를 스티븐스가 투숙하고 있는 호텔로 보냈고 4명은 스티븐스에게 관련 기사의 정정과 해명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스티븐스가 이를 거절하자 4명은 격분하여 스티븐스를 구타하였고 해당 내용을 보고하였습니다. 따라서 본인의 죽음을 스스로 원했기에 전명운, 장인환 의사가 이로부터 2일 뒤, 스티븐스를 처단하였습니다.  스티븐스의 처단 후 '대동보국회'의 장이였던 문양목 선생은 즉시 변호인단을 꾸려 2명의 영웅의 재판 후원 및 후원경비 조달, 변호사 교섭등에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이 후에도 크고 작은 많은 사건들 속에서 미주에서 한인들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선생은 헌신하였고 항상 검소하며 조국을 그리워했다고 전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