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나석주 선생(1892.2.4~1926.12.28)

2024. 12. 29. 03:50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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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나석주 선생(1892.2.4~1926.12.28)

격전의 독립운동 시기,그 한복판에 태어난 소년, 꺼져가던 민족혼에 다시 불을 지르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이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순국 직전 외침



애국계몽운동단체인 신민회 서북지방 책임자였던 김구 선생은 당시 양산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곳에서 한문을 배우고 독립정신을 교육받은 어린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나석주.

어릴적부터영향력있는 독립운동가들을 보며 자라고 몸과 마음이 독립투사로 키워져왔던 소년은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긋게 됩니다.

선생을 포함한 5명의 소년들은 당시 황해도지역의 부자 최병항 선생의 집에 밤 늦게 들어갔다. 세상에 이런 강도들이 또 있을까요? 5명의 복면을 한 강도들은 최병항선생앞에서 절을 한뒤다음과같이 말했습니다.

“저희는 일반 강도가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위해 군자금을 마련하러 왔습니다.” 최병항 선생은 말뜻을 바로 알아챘으나 한참을 고민한뒤 말했습니다. “너,석주로구나!그 복면을 쓰고 있을 필요 없다.그래 춘부장 어른께서도 편안 하시냐”

깜짝 놀란 선생은 복면을 벗고 6명의 소년은 무릎을 꿇었습니다.최병항 선생은 지금돈으로 수십억에 해당하는 돈을 바로 주었는데 이 금액에 6명의 소년은 크게 감동하여 큰 절을 올렸습니다.어린 나석주 선생은 당시에게 주도면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희들이 떠나면 즉시 일본경찰에 연락하여 강도를 당했다고 신고하십시오.안그러면 군자금을 지원해준줄알고 선생이 위험해 지십니다.” 1920년 역사에 의하면 11월 22일 6인조 연쇄강도사건이 영구미제사건으로 남아있습니다.

군자금을 들고 나석주 선생이 이동한 곳은 상해 임시정부였습니다.그곳에서 어릴적부터멘토이자 은사인 김구선생을 찾아갔고 나석주 선생은 한인애국단,의열단 등에서 활약을 하기 시작합니다.

“민족의 고혈을 빨고 있는 식산은행(殖産銀行)과 동양척식회사가 그대의 손에 폭파되는 날 일제의 간담이 서늘할 것이며, 잠자고 있는 조선의 민족혼이 불길처럼 다시 타오를 것이오. 대의를 위해 무운(武運)을 비는 바이오”

중국 산동성 출신. 나이 35세. 이름 마중덕(馬中德)’ 1926년 12월 26일 인천항에 상륙한 이 중국인은 다름 아닌 나석주였습니다..마중덕은 열차를 이용해 평안남도 진남포로향했습니다.

선생의 마음속에 한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향을 떠날 때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이별을 하게된 부모님, 부인, 아들 그리고 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운명은 어찌 이리도 슬픈 것이었을까요. 하필 그때 선생에게 ‘일제의 삼엄한 경계까 고향 일대에 펼쳐져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선생은 피눈물을 흘리며 다시 발길을 서울로 돌렸습니다.이때 선생의 마음이 어땟을까요 죽으러 가는 길,그 길의 마지막에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자식들을 못보고 열차에 오르는 선생의 모습.그의 눈빛이 상상이 됩니다.
1926년 12월 28일, 중국인 전용여관이었던 동춘여관에 선생은 투숙하였고 조국의 겨울은 너무나 추웠습니다. 아침밥을 든든하게 먹은 선생.마지막으로 거리를 지나다니는 동포들의 표정과 조국을 바라보던 선생은 드디어 식산은행으로 들어가 폭탄을던졌습니다. 그러나..

‘불발’

폭탄은 터지지 않았습니다. 절망적인 생각과 수많은 감정이 스쳐지나갈 때 선생은 재빨리 주변을 살폈고 다행이도 일본인들이 눈치를 못챈점을 이용해 태연하게 걸어나와 재빨리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달려갔습니다.달려가던 선생은 결의에 차있었으며 어쩌면 미소를 짓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자신의 마지막 장소를 아는 사람,조국을 위해 나라를 위해,민족과 동포들을 위한 의로운 행동.동양척식회사를 들어가자마자 1층에서 일본인 1명 사살. 2층으로 뛰어올라가 또 다른 일본인 사살.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 도망가는 일본인 추가 사살. 토지부 간부들을 2층에서 집어 던져버리고 기술실로 뛰어가 폭탄 1개를 던졌습니다. 선생은 재빨리 1층으로 내려와 2명의 일본인을 추가로 사살하고 건물밖으로 나와 폭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은 다시 찾아옵니다. ‘다시한번 불발’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시야가 노랗게 변해갔습니다. 지금의 을지로1가 쪽에서 달려온 일본경찰을 쏘아 쓰러뜨릴 때까지도 폭발음은 들리지 않았고. 을지로 2가에 이르렀을 때에는 일본경찰들의 포위망이 완전히 좁혀졌습니다.나석주 선생은 운집한 사람들과 일본경찰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외칩니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투쟁했다! 이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나석주 선생은 현장에서 3발을 더 쏘아 일본 경찰과 일본 경감 다하타 유이지를 사살한뒤 마지막 한 발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자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