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차리석 선생(1881.7.27~1945.9.9)

2023. 9. 10. 13:51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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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차리석 선생(1881.7.27~1945.9.9)

불굴의 정신력으로 끝까지 임시정부를 지키다


1907년 차리석 선생은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대성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젊은이들에게 민족교육을 가르쳤습니다. 그 후 안창호, 양기탁 선생이 주도해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평양지역에서 활동하였고 신민회의 '교육으로 나라를 구한다는 교육구국', '독립군 기지개척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군사기지설립'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을 배워나갑니다.

당시 신민회는 위 두가지 목표를 위해 다양한 방법을 준비, 계획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로 1911년 이상룡, 이시영 선생이 서간도로 건너가 독립군 기지를 개척해 일본군과의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차리석 선생은 안창호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안창호 선생의 철학은 교육을 통해 젊은이들을 계몽시키고 젊은이들이 세상을 바꿀수있다는 믿음이었는데 안창호 선생의 교육철학을 실천하던 선생은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인 '데라우치 총독 암살시도사건' 을 구실로 1911년 1월 일경에 체포되어 3년간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 후 1919년 평양에서 3.1 만세시위운동에 참여 한 선생은 무력투쟁의 뜻을 품고 중국 상해로 건너갑니다. 상해에서 선생이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 곳에서 선생은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기자로 주 3회씩 신문을 발행하였는데 만주 지역 독립군들의 활동, 활약에 대해 자세히 알렸고 임시정부의 활동 및 진행사항에 대해 동포들과 독립운동가들에게 알려 조국독립의 꿈과 희망을 알려주는 언론인으로서의 역할을 시작합니다. 또한 미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과의 연계를 취재 보도하여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세력들이 외롭지 않도록 가슴 뜨겁게 독립의 열망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1920년대가 지나면서 독립운동사에선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대표적으로 만주지역의 무장투쟁사 봉오동전투, 대전자령 전투, 청산리 대첩, 간도참변, 자유시참변등이 이때 전부 일어나며 독립운동단체들의 연합이 안되고 임시정부가 필요없다는 무용론이 재기되는 등 독립운동의 암흑기 또한 찾아옵니다.

이런 시기에 선생은 김구, 이시영, 조소앙, 이동휘, 조완구 선생등 임시정부의 주도적 인물들과 교류하며 독립운동계에 단결이 그 어느때보다 필요함을 신문을 통해 피력하였습니다. 아래는 선생이 당시 지면을 통해 한 말입니다.

“임시정부의 내일은 곧 군주제의 청산이며, 민주화의 새 출발을 기약함에 있습니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전진하고 대동 단결합시다”

선생은 지면에 글을 남기는 것 외에도 안창호 선생이 조직한 흥사단에 가입하여 청년인재 양성을 위한 노력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수시로 청년들을 모아놓고 강론회를 개최하여 여러 주제로 강연과 토론을 진행하였고 민족정신을 교육했습니다. 흥사단에서 선생은 이사로 재직하며 1945년 광복까지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는데 1922~1931년간은 임시정부 활동이 침체기였음을 고려해보면 독립운동의 암흑기에도 선생의 독립운동을 향한 열정은 조금도 식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봉창, 윤봉길 선생의 의거 후 일제의 독립운동단체에 대한 감시는 절정을 이루었고 상해 임시정부는 항주(항저우) 지역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항주로 이동한 후에도 임시정부는 잦은 이동을 하였는데 중일전쟁의 결과가 중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어쩔 수 없이 이동 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었죠. 결국 임시정부는 중국 중경으로 가지 이전하게 되었으며 이곳에서 임시정부 직할부대인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어 1945년 광복 전까지 군사작전을 전개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는 크고 작은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이고 변절자, 밀정 또한 있었으며 서로다른 단체들과의 연합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중국과의 외교, 임시정부 운용자금 확보등 각 분야에서 서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 사명을 다한 숨겨진 영웅들이 있었으며 선생도 이렇게 임시정부를 지켜온 장본인이었습니다. 선생은 국무위원, 중앙감찰위원장을 겸직하며 광복군의 항일전투 준비에 최선을 다했으나 우리는 갑작스럽게 우리의 힘으로가 아닌 미국의 핵폭탄 투하로 인한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고 한국광복군의 서울에이쓴 일제를 진공시켜버리는 서울진공작전을 코앞에두고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1945년 9월 9일, 차리석 선생은 광복을 맞이 한후 조국의 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임시정부 청사에서 한 많은 세상을 등지고 눈을 감으셨습니다.

그 뒤 김구선생의 아들 김신 장군이 이동녕 선생의 유해와 함께 선생의 유해를 모셔다가 지금의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안장하였고 1948년 사회장 당시 이시영․김구 선생은 차리석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며 추모하였습니다.

“차리석 선생은 해외혁명운동자 가운데 특히 강력한 정신력을 소유하시기로 유명하시었다. 탁월한 사무처리의 기능이나 병중에서도 최후의 일각까지 맡으신 사명을 완수하신 강한 책임감은 한국독립운동에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