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황현 선생(1855.12.11~1910.9.10)

2023. 9. 10. 15:45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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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황현 선생(1855.12.11~1910.9.10)

국치를 통분하며 자결한 시인


황현 선생은 나라를 빼앗김에 통분하여 자결한 시인으로 유명합니다. 서울에 올라와 과거를 보았고 34세에 성균관 학생이 되었으나 당시 만연했던 과거시험의 폐단을 직접 목격하고 더이상 관직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선생은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냉철하고 청렴한 지식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같은 '진정한' 관리(오늘날 공무원)들이 잇달아 자결을 하였고 이에 가장 가슴아프게 슬퍼하던 지식인중 한명이 황현 선생이었습니다. 선생은 이들을 추모하며 오애시(五哀詩)를 지었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시인은 아마 윤동주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겁니다. 윤동주가 지식인의 한계를 시로 표현하며 죽마고우 송몽규를 동경하던 모습을 우리는 영화 '동주'를 통해 다시한번 기억하게 되었죠. 황현 선생은 시로서 영웅들을 추모하며, 친일인사들을 풍자하는 시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선생에게 들리는 한 소식.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선생은 동생 황원과 가족들에게 유서를 남깁니다. 황현 선생은 죽음으로서 시대의 아픔을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나라를 자기자신과 가족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요즘같은 시국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절명시 4수를 남기고 결국 선생은 자결합니다. 이때 선생의 나이 56세였습니다.

대신이 국난에 죽는 것은
여러 벼슬어치들 죽음과는 다르네
큰 소리내며 지축을 흔드니
산악이 무너지는 것 같아라
(…)
인생은 늦은 절개를 중히 여기고
수립하는 일은 진실로 어렵고 삼가야 한다
낙락장송은 오래된 돌무더기에서
송진 향기 천 년을 가리라    //조병세 추모시

"세상 꼴이 이와 같으니 선비라면 진실로 죽어 마땅하다. 그리고 만일 오늘 안 죽는다면 장차 반드시 날로 새록새록 들리는 소리마다 비위에 거슬려 못 견뎌서 말라빠지게 될 것이니 말라빠져서 죽느니보다는 죽음을 앞당겨 편안함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 //동생에게 남긴 말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국가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러왔는데, 나라가 망할 때에 국난을 당하여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어찌 원통치 않은가? 나는 위로는 황천(皇天)이 상도(常道)를 굳게 지키는 아름다움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글을 저버리지 않는다” //가족에게 남긴 글

난리 통에 어느새 머리만 희어졌구나 몇 번 목숨을 버리려 하였건만 그러질 못하였네 하지만 오늘만은 진정 어쩔 수가 없으니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만이 아득한 하늘을 비추는구나.

요사한 기운 뒤덮어 천제성(天帝星)도 자리를 옮기니 구중궁궐 침침해라 낮 누수(漏水)소리만 길고나 상감 조서(詔書) 이제부턴 다시 없을 테지 아름다운 한 장 글에 눈물만 하염없구나.

새 짐승도 슬피 울고 산악 해수 다 찡기는 듯 무궁화 삼천리가 이미 영락되다니 가을 밤 등불아래 책을 덮고서 옛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승에서 지식인 노릇하기 정히 어렵구나.

일찍이 조정을 버틸만한 하찮은 공도 없었으니 그저 내 마음 차마 말 수 없어 죽을 뿐 충성하려는 건 아니라 기껏 겨우 윤곡(尹穀)을 뒤따름에 그칠 뿐 당시 진동(陳東)의 뒤를 밟지 못함이 부끄러워라.  //선생의 절명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