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안무 선생(1883. 6. 29 ~ 1924. 9. 7)

2023. 9. 7. 08:39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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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안무 선생(1883. 6. 29 ~ 1924. 9. 7)

봉오동 청산리 전투 승리에 빛나는 대한국민회군 사령관

안무 장군은 경성지역의 무인집안 출신이신데, 대한제국의 군인이었습니다. 군인이 된 후 주된 보직은 국경 지대에서 군사 훈련을 담당하는 교관으로 근무하였고 1907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함경북도 지방에서 체육 교사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3년 뒤 국권이 피탈되자 이를 계기로 북간도로 망명한 뒤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에 뛰어듭니다.

북간도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안무 장군에게 조국으로부터 3.1 만세운동시위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를 계기로 '대한국민회'를 조직하고 '국민회군' 사령관으로 취임하게됩니다. 과거 교관시절의 경험을 살려 국민회군의 훈련을 맡았으며 독립군의 양성과 세력확장에 모든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리하여, 1920년 드디어 장군에게 기회가 찾아옵니다.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도독부와 연합하여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쾌거를 이룹니다. 이 봉오동 전투는 역사적으로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일본의 정규군대가 군대가 해산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무참히 참패를 한 사건 이었기 떄문이죠. 이 후 일본은 이 치욕을 갚으러 엄청난 수의 군대를 투입했고 이어서 벌어진 전투가 그 유명한 청산리 전투입니다. 김좌진, 홍범도 장군과 함께 안무장군은 청산리, 대전자령 등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일본 정규군을 거의 섬멸해버립니다. 그 후, 독립운동사의 가장 슬픈 사건인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자 다시 북간도로 돌아와 독립군의 조직 개편 및 사기 증진을 위해 남은 여생을 바치다가 일본 경찰의 습격에 총을 맞고 체포되었으며, 일본으로부터 치료를 받을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완강히 거절하며 그 자리에서 바로 사망하였습니다.

독립군의 독립전쟁은 승패여부를 떠나, 투쟁 자체로서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식 군인들이 아니었고 평범한 일반 국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한국 독립군의 활동은 그만큼 더욱 값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의 주역으로 활동하다가 1924년 9월 7일 북간도 용정에서 순국한 안무 장군의 위업은 우리 후손들에게 오래도록 빛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