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28. 02:19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홍언
선생은 근현대사, 민족운동사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미주한인사회를 연구해온 사람들에겐 매우 친숙한 인물이다. 선생의 본명은 홍종표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한학을 수학하고 일시 중국을 다녀온 뒤, 1904년 하와이로 이민했다. 1904년 하와이 이민선을 탔던 홍언 선생은 신한민보 주필과 발행인으로 활동하면서 반세기 넘도록 미주 곳곳에서 '글의 칼'로 조국의 독립에 앞장섰다. 하지만 애국지사의 삶은 넉넉하지 못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선생은 1904년 하와이에 이민해 미주 한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중앙총회 부회장을 지내며 교민사회를 이끌었다. 그는 흥사단 창립에 참여했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홍언 선생은 1907년까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을 하다가 대한자강회 회보의 편집을 맡았다고 한다.
대한자강회 하와이지회는 1907년 3월 31일 발기되었는데, 주도적 인물이 홍언 선생의 형인 홍경표였다. 홍언, 홍경표 형제는 1907년 12월에 창간된 『자신보』의 편집에도 관여하였으며, 이어 하와이의 한인단체들이 합동하여 결성된 한인합성협회에서 1907년 10월 22일자로 창간한 주간지 『합성신보』의 편집에도 참여하였다. 하와이에서 자강회에 참여하였다가, 합성협회로 통합되자 합성협회에 관여하고, 이어 국민회와 대한인국민회에 참여하였다. 1909년 5월에는 국민회 호놀룰루지방회의 학무원으로 선임되었다.
선생은 1910년 이전에는 하와이에서 여러 언론매체의 주필로 활동했고 1911년 이후부터는 미주 본토지역에서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인 『신한민보』의 편집자와 기고가로 수십 년간 글을 썻다.
『신한민보』에 선생의 필명인 ‘동해수부’를 검색해보면 논설,수필, 시, 소설, 희곡 등 다양한 장르에서 수백 편의 기사가 나오는데, 이 모든 것이 선생의 글들이다.
1911년 8월 홍언 선생은 『대동위인 안중근뎐』을 국문으로 저술하여 신한국보사에서 발행하였다. 이 안중근 전기는 16면에 걸쳐 생애와 의거, 재판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는데, 장군으로서의 안중근을 부각시켰다. 이 전기는 하와이에서 적은 자료를 가지고 엮은 짧은 전기이지만, 홍언 선생이 역사가로의 출발을 알리는 저술이기도 하였다.
홍언 선생은 『신한민보』를 통해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글로서 남겼다.
윤봉길, 안창호 김구 선생에 관한 전기를 비롯하여, 이대위ㆍ문양목ㆍ조성학ㆍ임정구ㆍ김순권ㆍ천세헌 등 보다 일찍 세상을 떠난 민족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글을 남겼다. 이 글들은 매우 소중한 사료로서 취급 받고 있다. 선생은 『신한민보』의 편집과 기고 모두를 맡았는데 특히 1944년부터 1년간 ‘국민회약사’를 50여회 연재하며 국민회 역사 정리에 힘썼다.
흥사단(興士團)은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가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한 민족운동단체이다. 창립 당시 조선 8도의 대표들이 창립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는데, 경기도의 홍언(洪焉), 충청도 조병옥(趙炳玉), 경상도 송종익(宋鍾翊), 전라도 정원도(鄭源道), 평안도 강영소(姜永韶), 함경도 김종림(金宗林), 황해도 민찬호(閔燦浩), 강원도 염만석(廉萬石) 등이 그들이다.
흥사단은 미국 내에서 국권 회복에 기여할 인물을 양성하는데 주력하면서, 상해 임시 정부의 운영 자금을 조달하는 등 독립 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당시 미주 한인 사회에서는 한국독립운동을 위해 한인단체를 주도하거나 재정지원을 한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그러나 당시에 글을 쓰는 작가로서 이렇게 다양한 형식의 문예활동을 전개한 인물은 홍언 선생 밖에 없었다. 1919년 3·1운동 뒤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이 페루 등 남미에서까지 진행됐음을 입증하는 자료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처음으로 밝혀냈다. 홍언 선생이 육필로 쓴 한시(漢詩)집 ‘동해시초(東海詩초)’를 최근 발견한 것이다. 이 시집은 홍언이 1910년대 후반부터 쓴 한시를 1932년에 모은 것으로 1921∼22년 페루와 칠레, 에콰도르 등 남미 국가를 순행하며 경제력이 있는 화교(중국인)들을 상대로 독립자금을 모금할 당시 쓴 한시가 포함돼 있다.
3·1운동 소식이 1919년 3월 9일 미주에 전해지자 한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국민회) 중앙총회는 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 마련에 나선다. 국민회는 이민 역사가 오래돼 자본력이 있던 화교(중국인)도 모금 대상에 포함시키기로 그 해 4월 결의한다. 미주 한인이 당시 1만여 명에 불과하고, 대부분 가난해 모금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공부한 적이 있어 중국어와 한문에 능통했던 홍언 등 3명이 화교위원으로 임명됐다. 홍언은 중화회관 회장과 중국인신문사의 소개장을 가지고 미국 로키 산맥 서부 지역에서 모금 활동을 벌였다. 홍언은 1921년 6월 초부터 1년여에 걸쳐 남미 순행을 시작한다. 김도형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책임연구위원(국외사적지팀장)은 “당시 중남미 화교들에게 고려인삼을 팔던 한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남미에서도 자금을 거둘 수 있겠다고 판단한 듯하다”고 설명했다. 홍언은 미국 뉴욕에서 배를 타고 파나마와 에콰도르 과야킬을 거쳐 8월 초 리마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모금 성과가 비교적 좋았다. 리마에서 화교들은 홍언을 ‘한국지사 홍언’으로 부르며 환영했고 홍언 선생은 한국인들의 국권회복운동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중국 국민당 지부는 공회 재정으로 100원을 지원해 줬다. 홍언은 현지 중국어 신문에 한국의 참상에 관한 기고도 했다. 『신한민보』는 홍언의 활동에 대해 “중국인들이 동정을 보이며 의연금을 냈다”고 보도했다. 9월 리마를 떠나 12월 칠레 북부에 도착한 홍언은 중국 국민당 이키케 분부(分部)에서 칠레 은으로 8000원을 받았고, 공채 판매를 통해 2000원을 모금하는 데 성공한다. 홍언은 이듬해인 1922년 1월 12일 다시 페루 리마로 돌아오고,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모금하다가 페루독립기념관이 있는 우아초를 거친다 이곳에서 홍언 선생은 시 하나를 남긴다.
“태평한 이제는 오가는 사람조차 없어/지는 낙엽 푸른 이끼 속 사립문만 반쯤 닫혔네.”
- 동해시초(東海詩초)
홍언은 4월 초순 에콰도르 과야킬에서 마지막 힘을 쏟는다. 그는 “과야킬은 화인이 약 3000명이며 부상(富商)이 많다고 하니 최후의 성적을 이곳에 희망을 둔다”라고 보고했다. 이후 홍언은 멕시코 등을 거쳐 미국에 온 것으로 추정된다. 김 책임연구위원은 “당시 미주 지역에서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해 미주 지역을 ‘독립운동의 젖줄’이라고 불렀다”며 “홍언이 모금한 돈도 대한인국민회, 구미위원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였다”고 설명했다
동해시초에는 윤봉길 의사와 이봉창 열사를 기린 시도 10수씩 담겨 있다. 또 ‘나라 없이 이십 년이 되는 섣달 그믐날 저녁에 회포를 쓰다’라는 제목의 연작시 24수 중 제11수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3·1운동을 소재로 했다. “하북에서는 정거(停車)한 이등박문을 척살하였건만/한양에서는 선언서를 전한 소녀의 양손이 잘렸네/영용(英勇)에는 애초부터 묵적(墨跡)의 오염은 없나니/천추 두고 그의 주검 유해마저 향기롭네.”
1938년 3월 안창호 선생이 순국하자 홍언 선생은 각지에서 보내온 조전, 만장, 애가, 추도사 등을 모아 <영애록>을 편찬했다. 아래는 홍언 선생이 『신한민보』에 안창호 선생의 죽음을 애도한 글이다.
철인이 가시니 강산이 홀연히 의로워 거국이 같이 슬퍼하오며
정신이 계시매 일월이 영원히 비추어 민족의 앞길이 밝아지도다
1940년 58세 였던 홍언 선생의 직업은 현재 한인회의 뿌리인 대한인국민회 서기(Korean Association Secretary)였다. 그의 연봉은 고작 600달러로 당시 전국 평균의 30%에 불과하다. 월급으로는 50달러다. 최소한의 생활비에 만족했던 애국지사의 초연한 삶과 당시 넉넉치 못했던 대한인국민회의 자금사정을 엿볼 수 있다.
또 화교들과 교류하며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얻는 데 기여하는 한편, 한ㆍ중 연대에 이바지했다.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 페루 등을 순방하며 화교들로부터한국독립운동 지원금을 모았다
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의거를 풀어쓴 <대동위인 안즁근뎐>을 발간했고, 김구 선생의 활동을 담은 <김구 사략>을 연재
1949년 6월 김구가 암살된 뒤 큰 충격을 받고 뇌일혈로 쓰러져 1년 넘게 투병하다 1951년 3월25일 숨을 거뒀다 홍언 선생이 돌아가시자 <신한민보>에 이런 글이 게재되었습니다.
……선생은 고결한 선배였고 참된 애국자였다 그 평생을 우리의 언론기관을 위하여 힘써 왔고 우리의 문화향상과 사회와 국가에 대한 모든 것을 솔직하게 비판하던 작가요 시인이요 평론가였다 자기의 모든 사생활을 희생하면서 오직 한 조각 붉은 마음이 사회와 나라 뿐이었다… 선생의 일평생 생활은 대단히 의로웠고 또 바쁘셨다……
<신한민보> 1951년 4월 19일자 ‘델라노 한 농부’라는 필자의 ‘고 동해수부 홍언 선생 영전에’
홍언 선생은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고 미주한인들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한 역사가였다. 또한, 미주 한인사에서 제일 으뜸으로 뽑히는 문인이며 안창호 선생과 함께 흥사단을 창립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글을 쓰는 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점을 이제라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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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일 1영웅 알리기]"잊혀진 독립운동가를 찾아서"출처 독립운동가APP (대표 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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