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18. 13:57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청산리 그리고 나비장군 나중소선생
독립 전쟁에서 독립군이 거둔 가장 큰 승리로 기록되는 청산리 대첩!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분은 청산리 대첩에서 활약했던 나중소 선생입니다.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전 만주 독립군 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던 나중소 선생님의 일생을 지금 만나보겠습니다.
“청산리 대첩의 숨은 영웅, 나비장군”
나중소 선생은 1867년 4월 13일, 경기도 고양군(현재 서울 정릉)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탁월한 무예 실력을 자랑했습니다. 이로 인해 16세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곧바로 대한제국 무관학교에서 수학하였습니다. 이후 대한제국 진위대 부위로 재직한 선생은 1907년 9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로 해산 당한 뒤,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선발되어 국비유학생으로 유학해 일제의 군대의 특성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등에 참여해 무장투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1919년 3월, 나중소 선생은 북간도 왕청현에서 서일 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대한정의단의 교관으로 초빙되어 수백 명의 무장 독립군을 양성하였습니다. 그 해 10월 대한정의단이 북로군정서로 개편된 후에는 참모부장으로 사령관 김좌진을 보좌하였습니다.
청산리 대첩 기록화-박환교수
(이미지 출처 : 국가보훈처)
또한 북로군정서군의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을 겸임하며 300여 명의 독립군 사관을 기르는 힘썼고, 직접 일제와의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나중소 선생이 참가했던 청산리대첩은 독립군의 대승으로 유명합니다.
청산리대첩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6일 간, 청산리 일대에서 벌어진 대대적인 일제와의 전투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10여 차례에 걸쳐 일본 정예군대와 맞서 싸웠는데요, 나중소 선생은 이중 백운평과 천수평 전투에서 큰 활약을 보이며 일본군을 무찔렀습니다. 결국 청산리 전투는 단 1,300여 명의 독립군으로 일본군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을 포함한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고 끝이 납니다.
이후 나중소 선생은 러시아 이만 지역으로 이동하여 1921년 4월, 36개 독립군 단체들이 결성한 대한독립단 참모로 선임되었으나 6월에 일어난 자유시참변으로 인해 다시 북만주로 돌아와 후임을 양성하기 위해 안도현 군인양성소에 들어가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합니다. 1922년 8월에는 9개 독립군 단체들이 모인 대한독립단을 재건하고, 만주 독립군 단체를 모두 통합하기 위한 노력을 했습니다. 1924년 3월, 드디어 대한군정서가 재조직되자, 선생은 서무부장 겸 참모에 임명됩니다.
청산리 대첩에서 사용한 무기
1925년 3월, 애국지사들을 규합한 신민부가 조직되자, 중앙집행위원회 참모부위원장을 맡았고, 9월에는 신민부와 정의부의 연합부대에서 간도의 간도의 훈춘, 장백 및 함경도 등을 관할하는 서남로향관(餉官)에 임명되는 등, 요직을 맡으며 무장항일투쟁의 훈련을 계속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나갔습니다.
하지만 1928년 8월, 신민부의 지방조직을 설치하던 나중소 선생은 돌연 돈화현 산중에서 숨을 거두고 맙니다. 정부는 독립군 양성과 청산리대첩에서 무장투쟁을 벌인 선생의 공적을 인정하여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나비장군’이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했던 나중소 선생, 자신의 뛰어난 무예와 실력을 조국의 독립을 위한 후배양성에 쏟아 부었던 그의 고귀한 희생정신은 독립군들에게 충분한 구심점이 되어주지 않았을까요? 우리 역시 그 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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