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22. 10:40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가 남자현 선생(1872.12.7~1933.8.22)
효부, 열녀, 열사 등 지조와 도덕•예지와 의용이 만인의 귀감이 될만한 여사.
“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여 내가 남긴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하라.”
남자현 선생은 영화 <암살>에서 배우 전지현씨가 맡은 역할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여성 독립운동가입니다. 실존인물이기에 더욱 이슈가 되었던 남자현 열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선생은 7세에 국문에 능통하였고 소학과 대학을 통달하였다 합니다. 19세가 되던 무렵 김영주에게 시집을 가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으나 일본의 만행이 점점 극성을 부리자 남편 김영주는 부인 남자현 열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집을 나간 후 영양군 지역 의병장이었던 김도현 선생과 함께 왜군과 전투 중 전사합니다.
"나라가 망해 가는데 어찌 집에 홀로 있을 것인가. 지하에서 다시 보자"
남편의 전사소식을 들은 선생은 복수심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으나 어린 아들과 시부모를 봉양하지 않을수 없어 직접 명주를 짜 내다 팔아 생계를 이어 나갔습니다.
1919년, 시간이 흘러 남자현 선생이 46세가 되던 무렵, 전국에서 일어나는 3.1만세 운동을 따라 이제야 남편의 원수를 갚을 때가 왔다고 판단한 선생은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있는 서로군정서에 가입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독립군의 뒷바라지를 도맡아 일하며 북만주 일대에 12개의 교회를 건립하였고 여성계몽운동에 힘써 10여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하였고 여성의 권리 신장과 자질향상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서로군정서에서의 생활이 어느덧 6년이 지날 무렵, 선생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옵니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암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 거사를 추진하였으나 삼엄한 경계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1927년 봄, 안창호 선생이 독립운동가들과 망명해있는 조선인들 500명을 모아 나석주 의사의 추도회 및 미래의 조국을 위한 강연회를 열자 일본은 중국 헌병사령관을 협박하여 안창호, 김동삼 선생 등 3백 명을 강제, 불법 체포하였습니다. 이때 남자현 열사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석방될 때까지 정성껏 옥바라지를 했으며 끊임없이 탄원서를 넣어 결국 보석으로 풀려나게 한 공이 있습니다.
또한, 훗날 만주사변이 일어난 후 독립운동가 김동삼 선생이 일본경찰에게 붙잡히자, 아무도 선생과 접촉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남자현 열사는 그의 친척으로 위장, 면회를 허가 받고 연락책 역할을 해냅니다. 김동삼 선생의 지시내용을 동지들에게 전달하는 동시에 그가 국내에 호송될 때 구출하기 위하여 치밀한 계획까지 세웁니다.
시간이 지나, 1932년 9월이 되었습니다. 이때 세계에서는 국제연맹조사단이 일본의 침략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파견되었는데 이 소식을 접한 남자현 선생은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 왼손 무명지 2절을 잘라 흰 천에다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쓴 뒤 잘린 손가락마디와 함께 국제연맹조사단에 전달했습니다. 민족의 강인한 독립정신을 인식시키면서 일인(日人)들에게 속지 말도록 호소하였던 것이죠. 역사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러한 행동과 용기가 안중근 의사의 혈서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또한 선생은 마지막 죽기직전까지도 조국을 생각하며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 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여 내가 남긴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쳐라"
당시 화폐 248원, 이 돈은 그의 자식들에게 전해져 실제로 광복 후 1946년 3월 1일 김구 선생에게 전해졌습니다.
인격 등 모든 분야에서 뛰어나며 일평생을 오로지 조국의 자주독립과 민족의 존영을 위하여 싸우다 옥고로 순국한 남자현 선생. 선생은 1933년 8월 마침내 죽기로 결심하고 옥중에서 15일 동안의 단식투쟁을 벌였으나 6개월간의 혹독한 고문과 옥중 생활로 사경에 이르게 되었고, 사태가 이에 이르자 일본경찰은 보석으로 석방하였고 며칠후 서거하였습니다. 당시 하얼빈의 사회유지, 부인회, 중국인 지사들은 여사를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존경하고 하얼빈 남강외인(南崗外人)묘지에 안장하여 입비식(立碑式)을 갖고 생전의 공로를 되새겼으며 여성으로서 평생을 바쳐 독립운동의 정화(精華)가 되어 찬란한 빛을 남긴 여사의 영전에 동지들은 깊은 애도를 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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