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9. 1. 00:14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가 이종일 선생(1858.11.6~1925.8.31)
3.1독립선언문을 낭독하다.
오늘에 이르러 봉건의식을 벗어나 ‘신촌정신’을 특별히 강조하는 뜻은 먼저 ‘정신을 개조’하고 그 다음에 물질의 풍요가 뒤따라야 되기 때문이다. - 선생의 비망록 中 -
이종일 선생은 어려서부터 두뇌가 영특하여 신동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향리에서 한문을 배우며 사서삼경을 공부했던 선생은 16세에 부모님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문과에 급제하였습니다.
1882년 선생은 박영효 수신사의 사절단 멤버로 일본으로 건너갔고 쇄국정책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명을 받아들여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일본의 개화 모습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때부터 선생은 유교사상만 고집하는 기존의 태도에서 벗어나 실학과 개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실제로 독립신문에 개화의식에 관한 논설을 기고하기도 하였습니다.
1898년 3월, 동료들의 만장일치로 개화사상을 알리는 '대한제국민력회' 를 조직하여 1대 회장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재밌다고 생각되는 점은, 이때 선생은 중추원 의관에 임명이됬는데 급제를 한 오늘날로따지면 고시를 패스해서 고위공무원이 된 사람이 공권력과 어찌보면 정 반대되는 활동을 같이 하고 있던 것이죠. 실제로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이자는 철학과 모두가 평등한 세상은 거의 같이 전파가되니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이종일 선생의 이런 혁신적인 태도가 3.1독립선언문을 낭독하게 되는 모습까지 이어진다고 봅니다.
서구 열강들의 야욕과 침략이 국내에 영향을 미치며 혼란기가 찾아오자
선생은 나라를 구하는 것이 먼저라 판단하고 10개월 만에 중추원 의관직을 그만두었습니다.
의관직을 그만두자마자 선생은 흥화학교를 설립하였고 보성학교 교장에 취임하며 젊은이들의 교육에 집중하였습니다. 또한 30세 전후의 청년들을 모아 '애국단'을 조직하였고 신문사업을 통해 실학운동을 전개하는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선생의 신문사업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순 한글로 이루어진 <뎨국신문>을 창간하였는데 처음으로 여성들도 볼 수 있는 애국계몽지를 간행하였기 때문이죠. 거의 같은 시기에 창간된 <황성신문>은 한자로 쓰여져 있어 한자를 읽을 수 있는 계층만 볼 수 있었기에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신문이며 부녀자 계층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선생의 철학을 가늠 해 볼 수 있습니다.
선생은 1910년까지 <제국신문>의 사장 겸 기자로서 활동하였고 <황성신문> <만세보> <대한민보> 등의 기관지에도 적극 참여하며 언론활동을 통해 개화와 나라를 되찾으려는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1919년 1월. 너무나 갑작스런 고종황제의 의문의 죽음. 이 소식은 수많은 국민들의 울분을 폭발시켰고 일본인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식이 퍼지며 반일감정은 민족정서가 되버립니다. 이 시기에 일본 동경에서 들려오는 2.8 독립선언 소식. 나라를 사랑하던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 고문된 국내의 항일운동단체, 종교 단체, 유림, 학생들, 전 국민이 하나가 되어 시위운동을 준비하게 됩니다.
선생은 독립선언일을 2월 28일로 주장하였고 독립선언서의 인쇄를 맡겠다고 말한 후 25일까지 1차로 2만 5천장, 2차로 1만장을 추가 인쇄완료하였습니다. 선생이 신문사를 운영했던 것이 나라를 위해 쓰이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죠. 인쇄한 독립선언서를 선생은 각 계의 동지 8명에게 2천장 또는 3천장씩 나누어주었는데 선생의 손녀인 이장옥 선생의 기록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할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선언서를 배포해 주었는데 증표를 제시해야 선언서를 내주었어요. "
1차로 인쇄된 2만 5천장은 모두 배포가 완료되었고, 추가 인쇄한 1만장을 전국 주요 도시에 배포할 계획이었습니다.
2월 28일이 됩니다. 민족 대표 33인은 이자리에 모여 새롭게 결의를 다졌고 선언서에 33인의 이름을 실명으로 서명합니다. 그리고 선생은 그자리에서 직접 조선총독부로 전화를 하였고 큰 목소리로 위엄있고 절도있게 독립선언문 낭독을 시작합니다. 그 자리에 있던 민족대표 33인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만큼 이 역사적인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20분 후 , 일본경찰 15명과 자동차 5대가 태화관을 포위합니다. 이때 한용운 선생은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오늘 우리의 모임은 곧 독립만세를 고창하여 독립을 쟁취하자는 취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장서고 민중이 뒤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명을 바쳐 자주독립국이 될 것을 기약하고자 여기 모인 것이니 정정 당당히 최후의 일각, 최후의 일인까지 독립쟁취를 위해 싸웁시다”
한용운 선생의 말이 끝나자마자 33인은 모두가 마치 짠 것처럼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였고 선생들을 체포하려는 일본경찰에게 독립선언서를 던지며 대한독립만세를 계속 외치며 연행되었습니다.
아마도, 이 대목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니 왜 전화를 해서 모두가 붙잡히게 되었고, 어쩌면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나지 못할 뻔도 하지 않았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잘 생각해보세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부터 일제는 독립운동가와 우리 국민들에게 엄청난 탄압과 고문을 자행하고 강제로 군대에 동원하고, 위안부를 운영하며, 우리말의 사용을 공식적으로 금지시킵니다. 하지만 1919년 이전에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말로 대화가 어느정도는 통하는, 아니 통한다고 믿었던 그런 시기였던 것이죠. 폭력적인 의열투쟁, 우리도 힘으로 나라를 되찾아야한다는 시기는 이러한 당시 우리나라의 '어른'들과 3.1만세시위운동의 한계를 경험한 다음세대들이 일으킨 것입니다. 1919년 말에 생긴 가장 유명한 무력투쟁단체가 의열단이라는점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실겁니다.
당시 이러한 민족대표들의 노력과 3.1만세시위운동의 흔적을 상세하게 담은 기록물이 있으니 박은식 선생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에 보면, 3월 1일부터 5월말까지 약 3개월간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체포된 자 46948명, 민가 715곳이 불타고 학교 2곳이 폐허가 되었으며 집회 횟수 1542회, 참여인원 205만 명이라고 기록되있습니다. 한 번 상상해볼까요,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고 핸드폰도 없습니다. 전국에서 국민 모두가 하나가 되지 않은 이상 이런 숫자가 대체 어떻게 나올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이런 민족입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고 우리의 지도자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소식에 국민 모두가 하나가 되어 전 세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치열하고 거국적인 그래서 더 아름답고 위대한 운동을 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랑스러운 엄청난 단결력을 가진 민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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