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9. 16. 22:48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가 심훈 선생 (1901.9.12 ~ 1936.9.16)
어머님!
우리가 천번 만번 기도를 올리기로서니 굳게 닫힌 옥문이 저절로 열려질 리는 없겠지요. 우리가 아무리 목을 놓고 울며 부르짖어도 크나큰 소원(민족독립)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리도 없겠지요. 그러나 마음을 합하는 것처럼 큰 힘은 없습니다. 한데 뭉쳐 행동을 같이 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그 큰 힘을 믿고 있습니다. 생사를 같이 할 것을 누구나 맹세하고 있으니까요. 그러기에 나이 어린 저까지도 이러한 고초를 그다지 괴로워하여 하소연해 본 적이 없습니다.
- 선생이 어머님에게 올린 옥중편지 중에서(1919) -
흔히 심훈 선생은 「상록수」의 작가, 「그날이 오면」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선생은 거기에 더하여 열혈 독립운동가였고,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에 대한 열정을 자신의 소설과 시로 표출한 항일 문학운동가이기도 하였다.
선생은 20세기 첫 해인 1901년 9월 12일 서울 영등포구 노량진에서 출생하였다. 심상정(沈相珽)과 해평(海平) 윤씨 사이의 3남 1녀 가운데 막내아들이었다. 본관은 청송(靑松), 호는 금강생(金剛生), 백랑(白浪) 등이 있다.
선생의 원래 이름은 대섭(大燮)이나, 훈(熏)이란 필명이 널리 알려졌다. 훈이란 이름은 1926년 동아일보에 영화소설 「탈춤」을 연재할 때부터 쓰기 시작하였는데, 이후 계속 그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막내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부터 양친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났다. 남달리 머리가 영민하였기 때문에 부모를 비롯한 주위의 기대 또한 매우 컸다. 선생의 성장과정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1915년 서울 교동(校洞)보통학교를 졸업하면서 당시 전국의 수재들이 모여들던 경성고등보통학교에 합격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철기 이범석이 재학하고 있었고, 같이 입학한 동기생들로는 동요 「반달」의 작가 윤극영,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로 이름 높은 박열, 그리고 공산주의 운동가로 유명한 박헌영 등이 있었다. 감수성이 누구보다 예민했던 선생이 1910년대 일제의 가혹한 무단통치하에서 이들과 같이 학창생활을 보낸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의 학창생활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이들과 더불어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수탈에 분노하면서 항일 독립운동 의지를 굳혀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침내 선생의 울분은 분출되었다. 경성고보 3학년 때인 1917년 일본인 수학선생과의 알력으로 백지 답안을 제출한 것이다. 이로 인해 선생은 수학 과목의 낙제로 유급을 당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여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만세시위운동에 앞장섰다. 그러한 사실은 선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도 잘 나타나있다.
심대섭(심훈) 외 60명은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그 시위운동을 개시함을 듣자 그 취지에 찬동하여 정치변혁을 목적으로 많은 군중과 함께 불온 행동을 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하려고 기도하여 1919년 3월 1일 경성부 파고다 공원에서 위의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는 수천인의 군중에 참가하여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경성부내의 각 곳을 광분하여 치안을 방해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사정상 불참한 4인을 제외하고 태화관에 집결한 29인의 민족대표들은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독립선언식은 민족대표들이 이종일이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돌려보고, 한용운의 연설에 이어 만세삼창을 하는 것으로 간단히 끝났다. 하지만 탑골(파고다)공원에서는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여 있다가 2시 30분경 독자적인 독립선언대회를 거행하고, 곧 시가지로 물밀듯 밀려나가 만세시위를 전개함으로써 3.1운동의 불꽃을 지폈다.
선생은 바로 이러한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거행된 독립선언 민중대회에 참여하였고, 이어 서울 각지로 전개된 만세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그리고 3월 5일 선생은 서울에서 각급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최대의 시위운동인 남대문역(서울역) 만세 시위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만세시위운동 과정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었던 것이다.
3.1운동 기간 중, 서울에서 전개된 최대 규모의 시위운동이 바로 남대문역 만세시위운동이다. 이 만세시위운동은 3.1운동 학생 대표였던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강기덕과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등이 주도한 것이다. 여기에는 선생을 비롯한 서울지역의 학생 대부분과 광무황제의 인산을 마치고 귀향하던 지방 유생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1만여 명에 이른 시위행렬은 인력거를 타고 ‘대한독립기’를 앞세운 강기덕과 김원벽을 따라 한 갈래는 남대문 시장으로부터 한국은행을 거쳐 종로 보신각에, 다른 한 갈래는 남대문으로부터 대한문 앞과 을지로 입구를 거쳐 보신각에 이르렀다. 그리고 보신각에서 다시 하나가 되어 부르짖는 시위 군중들의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지축을 흔들며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 잠재된 한국 민중의 독립 욕구를 일깨웠던 것이다.
선생 또한 이 날의 만세 시위운동에 동참하여 민족 독립의 열기를 맘껏 분출하다가 조남천, 손덕기, 최강윤 등 같은 학교 학생들과 함께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선생은 1919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의 예심종결 결정을 거쳐 정식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이에 따라 석방되었지만, 선생은 이미 미결기간까지 포함하여 약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뒤였다. 옥중에서도 선생의 민족 독립을 향한 결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선생이 투옥 중, 어머니를 위로하고 조국 독립에 대한 결의를 다진 다음과 같은 옥중편지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치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몇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이 땅에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님보다도 더 크신 어머님(조국)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조국 독립에 대한 이 같은 열정이 있었기에 선생은 출옥하자 곧 해외로 망명하여 유학하기로 결심하였다. 3.1운동 참여로 경성고보에서 퇴학당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그리하여 그 해 겨울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에서 단재 신채호와 우당 이회영 등 독립운동가들을 만났고, 그 분들의 영향으로 민족독립의 의지를 더욱 굳혔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때의 사정은 다음과 같은 선생의 회고에 잘 표현되어 있다.
기미년(1919) 겨울 옥고를 치르고 난 나는(심훈) 어색한 청복(淸服)으로 변장을 하고 봉천을 거쳐 북경으로 탈주하였다. 몇 달 동안 그곳에서 두류(逗留)하며 연골(軟骨)에 견디기 어려운 풍상을 겪다가 수삼차 단재(신채호)를 만나 그의 우거(寓居)에서 며칠 저녁 발치 잠을 자면서 가까이 그의 모습을 접하였다. 감명 깊은 그의 말씀도 여기서는 약할 수밖에 없다. … 북경(北京)서 지내던 때의 추억을 더듬자니 나의 한평생 잊히지 못할 또 한 분의 선생님이 생각이 난다. 그는 수년 전 대련(大連)서 칠십 노구로 쇠창살에 갇히어 이미 고인이 된 우당(이회영) 선생이다. 나는 맨 처음 그 어른에게로 소개를 받아서 북경으로 갔었다.
부모의 슬하를 떠나 보지 못하던 19세의 소년은 우당장(友堂丈)과 그 어른의 영식인 규룡(圭龍)씨의 친절한 접대를 받으며 월여(月餘)를 묵었다. 조석으로 좋은 말씀도 많이 듣고 북만에서 고생하시던 이야기며 주먹이 불끈불끈 쥐어지는 소식을 거기서 들었는데, 선생은 나를 막내아들만치나 귀여워해 주셨다.
3.1운동에 참여한 경험을 가진 선생이 단재와 우당을 만난 것이다. 이 시기 단재와 우당은 일제와 어떠한 형태의 타협도 거부하는 절대독립론, 독립운동 방략으로 무장투쟁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임시정부에서 나와 북경에서 '천고(天鼓)'라는 잡지를 발행하며 임정의 외교 독립운동노선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분들과의 만남은 선생에게 절대독립에 대한 각오를 다시금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선생이 일제와의 어떠한 형태의 타협도 거부하며, 열정적으로 민족독립을 부르짖는 주옥과 같은 항일 문학작품을 남겼던 것도 바로 여기에 그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립운동가 이인영 선생(1868.923~1909.9.20) (0) | 2023.09.20 |
---|---|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 1885~1918 (0) | 2023.09.16 |
독립운동가 양근환 선생(1894.5.9~1950.9.15) (0) | 2023.09.15 |
독립운동가 최팔용 선생(1891.7.13~1922.9.14) (0) | 2023.09.15 |
독립운동가 김민찬(金玟贊) 선생 (0) | 2023.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