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장태수 선생(~1910.11.27)**

2025. 12. 1. 00:39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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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장태수 선생(~1910.11.27)**

경술국치 앞에서 단식으로 항거한 대한제국의 마지막 문신

조선의 말기, 장태수 선생은 나라의 중책을 두루 맡았던 고위 문신이었다.
그러나 그가 관료로서의 안락을 선택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국가의 운명이 흔들릴 때마다 그는 매번 자신의 삶을 내려놓고 올곧은 길로 돌아갔다.

1895년 8월 20일, 조선 왕실을 뒤흔든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난 뒤,
뒤이어 단행된 단발령은 수백 년 동안 지켜온 민족적 가치와 효의 근본을 무너뜨렸다.
‘신체발부 수지부모’—신체의 털끝 하나라도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함부로 훼손할 수 없다는,
조선이 지켜온 삶의 윤리가 한순간에 짓밟힌 것이다.

장태수 선생이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내려온 것은
그가 시대를 거슬러 고집을 부렸던 것이 아니라,
부모의 은혜와 조선의 가르침을 지키려 했던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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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관직, 그리고 두 번째 충절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장태수 선생은 은거를 멈추고 다시 궁으로 돌아왔다.
나라가 위태로운 순간, 고종을 곁에서 보필하고자 다시 벼슬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이완용·박제순·이지용·이근택·권중현 등 을사오적에 의해 강제 체결되자
선생은 더 이상 조정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그는 상소를 올려 을사오적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나라가 통째로 흔들리는 순간에도 그가 지킨 것은 권력도, 자리도 아닌 오직 ‘의리’였다.

그리고 결국, 그는 관직을 다시 버렸다.
경술국치의 비통 앞에서, 더 이상 일제의 통치 아래 조선의 신하로 머무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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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회유와 선생의 마지막 선택

조선의 충신들이 백성들에게 미칠 영향이 너무 크다고 판단한 일제는
그들을 회유하기 위해 고위직과 막대한 금전을 제시했다.
장태수 선생의 집에도 일본 헌병이 찾아와 금전으로 유혹하며 협력을 요구했다.

그러나 선생의 대답은 단호했다.

“나라가 망하는 것도 차마 볼 수 없는데,
하물며 원수의 돈을 어떻게 받겠는가.”

칼과 총으로 위협해도 그의 마음을 꺾지는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스스로를 향한 마지막 심판을 내렸다.

“나라가 망했는데 원수를 갚지 못했으니 불충이며,
적의 이름 아래 몸을 더럽혔으니 불효다.
이런 죄를 지었으니 살아 있는 것조차 이미 늦었다.”

선생은 단식에 들어갔다.
그리고 단식 24일째 되던 1910년 11월 27일,
나라를 삼킨 어둠보다 더 강한 결의를 지닌 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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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글

한 인간의 생은 짧고, 역사는 길다.
하지만 어떤 이의 죽음은 오히려 역사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기도 한다.

장태수 선생의 삶은 한 시대의 몰락 앞에서
어떤 이가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칼을 들지 않았지만, 배신도 타협도 허락하지 않았다.
신념을 위해 굶주림을 택했고, 조국의 이름이 지워지는 순간에도 자신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의 단식은 스스로를 죽이는 선택이 아니었다.
부끄러움 없이 조선의 마지막 신하로 남기 위한,
한 인간의 가장 치열한 항거였다.

그 결기와 침묵의 투쟁이,
오늘 우리의 역사 인식 속에서 빛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