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7. 01:02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가 김경천 선생(1888.6.5~1942.1.2)
연해주 항일운동에 앞장선 전설적인 군인
"낙엽이 지기전에 무기를 준비하여 압록강을 건너고 싶다." - 김경천 장군
김경천 장군은 일제 강점기 최고의 무장독립운동중 한명이었습니다. 김좌진 장군은 독립운동 공으로 최고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우며 홍범도 장군은 공산당에 가입한 탓으로 다음훈장 대통령장을 받았습니다. 김경천 장군은 ‘수수께끼 인물’이라는 이유로 어떤 훈장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 교과서에서 잊혀져왔습니다. 김경천 장군의 별명은 백마탄 김장군 혹은 '진짜 김일성' 인데 북한의 김일성이 김경천 장군의 업적을 북한정권 권력을 잡는데 명분으로 삼아 이름을 바꿧다는 설이 있습니다. 바로 그 논란의 정가운데에 있는 전설적인 실존인물이 김경천 장군입니다.
2005년 그전까지 없었던 김경천 장군의 일기인《경천아일록》이 발굴되었습니다. 이 일기의 가치에 관하여 한 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경천아일록》의 발굴은 독립운동사를 새로 쓰게 만들 획기적인 사건이다. 김경천의《경천아일록》은 김구의《백범일지》, 이순신의《난중일기》에 버금가는 가치 있는 것이다. 한국 오천년 역사에서 장군이 적과 싸우면서 직접 기록한 것은《난중일기》와《경천아일록》이 있을 뿐이다. 그런 일은 세계사에도 드문 일로 카이사르의《갈리아 전기》 정도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1904년, 김경천 장군이 열여섯 살 나이에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일본에 유학을 가게되는데 아버지와 형은 공업을 배우라 했지만 장군은 ‘나폴레옹’ 책을 보고 미쳐버린 관계로 일본 육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일본 육사는 고등학교 과정과 대학교 과정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 육사를 졸업한 한국인은 백여 명에 이르지만 그 두 과정을 모두 정식으로 마친 사람은 김경천 장군 한 사람 뿐입니다. 그 외의 사람들은 편입생으로 고등학교 과정에 들어가 마치고 대학교 과정에 들어가거나 처음부터 대학교 과정에 들어갔습니다.
일본 육사에서 한국인 생도들은 모두 일본인 생도, 교관한테 온갖 설움을 받으며 공부했는데 김경천 생도만은 선망을 받으며 공부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공부할 때 한국인이 단 한 사람이였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마치 나폴레옹이 본래 프랑스의 식민지 출신인 관계로 프랑스 육사를 다닐 때 설움을 받은것처럼 말입니다.
장군은 최우등으로 육사를 졸업했으며 종합적인 성적은 ‘여태까지 일본 육사에서 공부한 사람들을 통틀어 최우등’이었습니다. 원래 일본 육사를 졸업하면 군복무 의무가 있는데 김경천의 경우에는 유학행 신분으로 육사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 의무가 없었습니다. 김경천이 졸업을 앞두고 자신은 일본군 장교 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일본 상층부에서 난리가 일어났고 조선총독 테라우치가 직접 찾아와 임관을 권유했습니다.
테라우치한테 임관 권고를 받은 장군은, ‘독립전쟁을 벌이려면 육사 졸업한 것 갖고는 안 된다. 일본군 장교 생활을 하여 일본 군사기밀을 알아내야 한다’는 계산 아래 그 권고를 받아들였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공무원으로 임명 받으려면 보증인이 있어야만 하는데 일본군 소위는 워낙 높은 자리라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유력자가 후견인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김경천의 경우 일본제국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관계로 일본천황이 소위로 임관 받는 그의 후견인이 되었고 동경제일사단에 배속되었습니다..
이름에서 유추할수 있듯이 이 사단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부 시절의 경복궁 부대처럼 최고 엘리트 장교들이 근무하는 부대였고 따라서 장군이 동경제일사단에서 근무함에 따라 일본 최고 지성인들과 교접하고 이에 당대 최고 지성인이 되었으며 일본제국 속사정을 확연히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1919년 3월1일, 조국에서 들려오는 ‘독립만세!’ 소리에 감격한 장군이 때가왔음을 깨닫고 독립운동을 하려고 탈영하였는데 당시 일본군 상층부에서 ‘큰일 났다!’며 오만 엔의 현상금을 걸고 그를 수배했습니다. ― 일제가 중국의 전설적 빨치산 영웅인 양정우에게 걸어놓은 현상금이 이만 엔이었습니다.
김경천 장군이 탈영하자 일본 기무사에서 그의 아내 유정화를 잡아들여 조사했는데 그녀를 깍듯이 대우했습니다. 아마 일본군 상층부에서 기무사에 김경천의 아내를 조사는 하되 정중히 대우하라고 지시했으며 탈영한 장군에게 연민,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탈영한 장군은 즉시 신흥무관학교로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지청천장군과 조우하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의 소식이 국내에 들리자 3.1운동으로 격앙된 젊은이들이 독립전쟁을 벌이기위해 대다수 학업을 중단하고 신흥무관학교로 찾아오는 사태가 일어납니다. 이에 크게 당황한 일제가 온갖방법을 동원하여 김경천 장군에 대한 유언비어, 음모론, 공작들을 펼쳤고 이로인해 중국인들과 문제가 생겨 김경천 장군은 스스로 자신으로인해 무관학교가 운영이 안되면 안된다 말하며 만주 삼원포를 떠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습니다.
러시아! 그 추운 곳에서 김경천 장군은 연해주의 전설이됩니다. 당시 러시아는 홍백전쟁이라 불리는 내전중이었는데 김경천 장군이 홍군 정부의 양해 아래 조선의 젊은이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켰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일본군이 백군을 도와 연해주를 공격했으니까요.
1920년 사월,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로 쳐들어가 점령했다. 이에 김경천 장군이 수청지방으로 피신했는데 이곳은 당시 조선인들이 많이 살아 빨치산들의 본거지 같은 곳이었습니다.
국제관계상 이곳까지 들어올 수 없던 일본군이 중국인 마적들을 사주하여 조선인들을 약탈하고 죽이는 일이 발생합니다. 상황이 이렇게되자 김경천 장군이 학생 삼십여 명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켜 마적들과 싸웠는데 그 소년 부대가 마적들과 싸워 번번이 이기자 어른들이 몰려들어 장군의 부대가 수백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결국 장군의 부대가 수청지역 마적 본거지를 공격해 점령함에 따라 그 지역에서 마적들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당시 일본군 수뇌진이 휘하 부대에 ‘김경천 부대를 만나면 맞서 싸우지 않고 피해도 된다’는 특별지시를 내려놓았으며 러시아 홍군 총사령관 우보레비치가 앞으로 한국의 독립전쟁에 물심양면 협력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실제로 우보레비치는 연해주 지역 한국인, 소련인을 망라한 유격부대 사령관으로 김경천을 임명했습니다.
1923년 상해에서 상해임시정부를 개편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김경천 장군이 군사담당 국무위원으로 내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창조파의 신정부 수립은 국내외 단체들의 반발에 부딪쳐 좌절되었고 나라 없는 신세인 조선인들이 서로 싸움을 벌이는 독립운동사에 암흑기가 찾아옵니다.
소련 집권층이 레닌이 뇌출혈로 죽은 후에 스탈린, 트로츠키 두파로 나뉘어 서로 싸웠는데 스탈린이 승리하며 단독지배권을 굳히기 위해 백육십만 명의 당원과 삼만오천 명의 장교를 숙청시켰습니다. 이때 김경천 장군의 후견인이었던, 소련군 원수급 장성 우보레비치가 숙청당했습니다. 그리고 스탈린은 김경천 장군을 간첩죄로 체포하고 감옥으로 보냅니다.
김경천 장군의 가족은 연해주 한국인의 카자흐 이주 때 휩쓸려 카자흐로 끌려갔는데, 이십만 명 한국인들은 이주하는 과정에서 모진 고생을 했습니다. 카자흐에서 가족과 재회한 장군은 자신의 3년간 감옥살이보다 아내의 고생이 마음 아팠고 아내의 고생에 보답하고자 그녀로 하여금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게 한 후 자신은 집단농장에서 일했습니다.
장군은 카자흐 한국인 사회에서도 절대적 존재로 떠올랐던 것으로 보이는데, 한 때 스탈린이 김경천에게 특별훈장을 두 번이나 내려주었음에도 연해주 한국인을 수만 리 먼 나라 카자흐로 강제 이주시켜버린 상태에서는 스탈린 당국에게 김경천 장군은 두려운 존재 그 자체 였습니다. 이에 스탈린은 다시한번 김경천에게 간첩죄로 유죄판결을 내리고 강제노동수용소 8년 형벌을 선고합니다.
김경천 장군과 함께 수용소 생활을 한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김경천은 재소자들한테 존경을 받았고 확신에 차 있으며 자유롭게 행동했다고 합니다. 1942년 당국이 다시 김경천을 소련 북동 쪽 끄트머리로 이감시킵니다. 그곳에서 장군은 사망했는데 사망 원인, 일시, 장소 등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당국에 의하면 심장질환으로 사망했고 김경천 가족에 의하면 총살 당했다 하는데 장군이수용소 안팎에서 스탈린 당국에게 두려운 존재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총살 설’이 옳은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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