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유 (朴勝裕) 1924-08-20 ~ 1990-01-02

2025. 1. 7. 01:08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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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유 (朴勝裕) 1924-08-20 ~ 1990-01-02

평생을 따라다닌 을사5적 ‘박제순’이라는 이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잘못을 평생 부끄러워했던,

광복군, 독립운동가, 6.25 참전 용사가 되었던

한 인물의 삶.
서울 종로(鍾路) 사람이다.

1944년 10월에 절강성(浙江省) 의오현(義烏縣)에 주둔 중인 일본군 횡정(橫井)부대에 배속되었다가 탈출하여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였다.



그는 무석(無錫), 무호(蕪湖), 남경(南京)지역에서 초모공작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음악에 소질이 있던 터라서 야전 방송대에 파견되어 같은 동포 사병들에 대한 반정(反正)권고와 염전(厭戰)가곡 등의 방송으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초모: 사람을 불러모음

(일종의 징병, 모병 활동)



일제 서슬이 퍼렇던 1924년 태어난 박승유는 스무 살이 된 1944년 일본군에 입대한다.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친일 관료로 활동하던 아버지의 지시였다.



그러나 청년은 아버지와도, 할아버지와도 달랐다. 같은 핏줄이라는 이유로 괴로워하던 박승유는 입대 한 달 만에 일본군에서 몰래 탈영한다.  그리고 갖은 고생 끝에 광복군을 찾아가 독립군이 된다. 가족의 친일행각에 대해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였다. 박승유는 이후 광복군에서 여러 공작 활동을 전개하고 음악에 소질이 있다는 장점을 살려 심리전 등으로 활약했다.



이 기간 박승유는 "할아버지는 대체 왜 자결하지 않으셨는가. 왜 후손들을 이다지도 욕되게 하는가"라며 박씨 성을 거부하고 가명을 쓰며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중학교 때부터 익혔던 음악실력으로 독립군들의 항일의지를 북돋았다.



광복 후에도 계속 대한민국 육군에 남아 있었는데 조선오페라협회 간사를 겸직하면서 음악활동을 계속했다. 1950년 2월 1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육군 상사로 전역(예편)하였는데 6.25 전쟁이 일어나자 자원입대해 국방부 정훈부 합창단원으로 전국 야전 부대를 돌며 위문공연을 벌였다. 휴전 이후에는 원광대 교육과 강사, 휘경여중.고 교사 등을 거쳐 75년부터 강원대 음악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진을 양성했고, 말년에는 서예가로 활동하였다.





1963년 박승유는 광복군에서 활동한 공적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으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고, 박승유에게는 오랫동안 친일파 일족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박승유는 평생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괴로워했고 1990년도 66세에 위암으로 별세했다.



시간이 흘러 1999년에서야 언론을 통해 을사오적의 후손 중 유일하게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그에 대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박승유가 사망한 뒤였다.





<개인적인 생각>

제보가 들어온 박승유 선생을 조사하면서 조상의 과오를 뉘우치기는커녕 뻔뻔하게 자기네 조상은 아무 잘못 없고 그땐 다들 그렇게 살았다며 으름장을 늘어놓는 친일파 후손들이 떠올랐다. 여전히 박승유 선생의 집안은 박제순이라는 을사5적으로 인해 친일파 집안으로 낙인이 찍혀있다. 태어나보니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을사5적이고 매국노인 현실은 어땠을까?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죄책감과 부끄러움이 평생 그를 이끌었다. 때로는 독립투사로, 때로는 6.25전쟁 자원입대 군인으로 이어진 속죄의 삶.



조상에 대한 부끄러움이 커 독립운동하던 사실도 드러내지 않고 살다 조용히 가셨다고 하니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너무나 감사했다. 박승유 선생으로 인하여 그 후손들은 친일후손이라는 오명에서 조금은 벗어나 고통 속에 살지 않게 되었다. 부디 하늘에서는 죄책감을 내려놓고 편안하시길 지금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진심으로 기도드렸다.





<참고문헌>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56·317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440·6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