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0. 12. 00:40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이봉창, 침묵 속의 결단
1900년 8월 10일, 서울 용산.
그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가게 점원과 철도국 견습생으로 일했다.
그러나 1919년 3월, 거리에서 울려 퍼진 “대한독립 만세”의 함성은
그의 삶의 방향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그는 더 이상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다시 상하이로 —
그의 발걸음은 한없이 떠돌았지만, 마음은 단 한곳을 향해 있었다.
“나라의 독립, 그 한 가지.”
1931년, 초라한 행색의 청년 하나가 임시정부 문 앞에 섰다.
그의 언어는 일본식이었고, 신발은 게다였다.
사람들은 그를 “왜놈 밀정”이라며 내쫓으려 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김구는 그의 눈빛 속에서
결연한 불꽃을 읽었다.
며칠 후, 술자리에서 그는 취한 듯 낮게 말했다.
“나는 일본의 왕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무기만 있었다면, 그때… 그때 나라를 위해 일을 치렀을 겁니다.”
그 말 한마디에 김구는 그의 진심을 믿었다.
이봉창은 정식으로 한인애국단에 입단했다.
그가 품은 것은 단 한 개의 수류탄.
그것은 한 개인의 무기가 아니라,
민족의 의지를 상징하는 ‘불씨’였다.
1932년 1월 8일, 도쿄 사쿠라다문 앞.
이봉창은 천황의 마차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비록 목표는 빗나갔지만,
그날의 폭음은 일본의 심장부를 흔들었고
세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그날 이후
윤봉길 의사의 이름과 함께 임정의 부활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는 1932년 10월 10일, 오사카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그의 나이, 서른둘.
김구는 모든 단원들에게 단식을 명했다.
“오늘, 우리는 한 사람을 잃었으나,
그의 죽음으로 우리는 다시 살아났다.”
광복 후, 김구는 그의 유해를 효창공원으로 모셔와
윤봉길, 백정기와 함께 안장했다.
그곳은 ‘삼의사묘’라 불린다.
지금도 효창공원 언덕에 서면,
그의 동상은 여전히 수류탄을 던지는 순간의 결의로 서 있다.
작가의 기록
나는 오래된 그의 흑백 사진을 복원하면서,
얼굴의 그림자 속에 깃든 결심을 본 듯했다.
눈은 웃고 있지만, 결코 굴복의 눈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끝까지 가겠다”는 고요한 맹세 같았다.
사진작가로서 나는 단지 색을 복원한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의 ‘빛’을 다시 끌어올린 것이라 믿는다.
시간이 지워버린 흑백의 틈에서,
그의 청년의 숨결이 되살아나는 순간
나는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느꼈다.
이봉창이라는 이름,
그는 세상에 폭음을 남기고 떠났지만,
그 울림은 지금도 이 땅의 공기 속에 퍼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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