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0. 20. 11:57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가 차희식 선생 (~1939.10.18)
- 화성 지역의 민중 3·1운동을 주도하다 -
“지금부터, 일본경찰서를 파괴하고 일본 순사를 처단한다!”
그 한마디는 억눌린 민중의 절규였고, 굴하지 않는 독립의 시작이었다.
1919년 3월, 경기도 화성의 들판은 분노로 들끓었다.
우정과 장안면 일대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의 중심에는 행동대장 차희식 선생이 있었다.
그는 주민들과 함께 면사무소와 경찰서 주재소를 파괴하고,
조선의 주권을 짓밟던 일본 순사를 처단했다.
그날의 외침은 단지 함성이 아니라,
조국의 피멍 든 대지 위에 새겨진 ‘정의의 울분’이었다.
화성 지역은 원래부터 자주의식이 강한 땅이었다.
동학의 정신이 천도교로, 그리고 기독교와 유교로 이어지며
신앙은 곧 ‘민족의 혼’이 되었고, 종교는 ‘독립의 언어’가 되었다.
차희식 선생이 태극기를 들었을 때,
그 곁에는 천도교인, 기독교인, 유교인 할 것 없이
모두 같은 깃발 아래 하나로 섰다.
그들의 분노는 단지 일제의 통치에 대한 반발이 아니었다.
그것은 빼앗긴 땅에 대한 절규, 수탈당한 삶에 대한 저항이었다.
토지조사사업이라는 이름의 강탈,
농민의 땀을 빼앗은 동양척식회사,
염세를 덧씌워 민중을 옥죄던 일본 지주들의 횡포.
이 모든 억압이 한순간에 폭발한 것이다.
3월의 함성은 곧 불꽃이 되었고,
2,500명의 주민이 횃불을 들고 태극기를 흔들며 나섰다.
그들의 행진은 정의였고, 그들의 분노는 신념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잔혹하게 응수했다.
4월 15일, 제암리교회에 주민들을 가둬놓고 불을 질렀다.
불길은 하늘로 치솟았고,
그 속에서 민족의 한이 함께 타올랐다.
차희식 선생은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혹독한 고문을 견디며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그 고통조차도, 선생의 신념을 꺾지 못했다.
그는 고통 속에서도 “조선은 반드시 다시 일어설 것”이라 믿었다.
-
작가의 글
때로 한 장의 낡은 사진 속에는
총칼보다 강한 신념이 숨어 있다.
나는 차희식 선생의 초상을 복원하며,
그 얼굴에 새겨진 분노와 결의를 마주했다.
그분의 눈빛은 두려움을 모르는 민중의 눈빛이었고,
그 속에는 불타버린 제암리의 잿빛 하늘이 고요히 비쳐 있었다.
나는 지금, 그 잿빛을 다시 색으로 물들이는 일을 한다.
사라진 목소리를 되살리고, 잊힌 이름을 불러내는 이 작업이
이 시대를 사는 한 사진작가로서
내가 이어가는 또 다른 ‘3월의 외침’이라 믿는다.
- 사진작가 김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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