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대지 선생 (1891 ~ 1942.10.26)

2025. 10. 27. 09:58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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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대지 선생 (1891 ~ 1942.10.26)

조국의 독립이 우선이었던 민족의 지도자

밀양의 젊은 청년 김대지는 나라를 빼앗긴 그해,
눈앞의 절망 대신 “되찾을 조국”을 바라보았다.
그는 동화학원을 졸업하자마자 밀양에 청년회관을 세우고
비밀결사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했다.
겉으로는 친목단체였지만, 그 속에는
“조국의 이름으로 죽겠다”는 청춘들의 피맺힌 맹세가 있었다.

1910년대 후반, 그는 국내에서의 한계를 절감하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과 만주로 향했다.
일제의 눈을 피해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그의 이름은 이미 조선총독부의 감시목록에 오르게 된다.
결국 1918년, 밀정의 밀고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옥에서 풀려난 그는 곧바로 망명을 결심한다.
임신 중인 아내와 어린 두 남매를 뒤로 한 채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밤의 국경을 넘었다.
그 길은 절망의 길이 아니라, 독립을 향한 첫 여정의 빛이었다.

1919년 봄, 상하이로 간 김대지는
김동삼, 이회영, 조소앙, 이시영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힘을 보탠다.
그는 임시정부의 조사원 자격으로 밀양에 잠입해
군자금을 모집하고 비밀 연락망인 연통제를 유지했다.
그 위험천만한 임무 속에서도 단 한 번의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신념은 언제나 한 가지였다.

“조국이 먼저다. 나는 그다음이다.”

1920년, 다시 떠난 고향 밀양은
그에게 마지막 작별의 땅이 되었다.
그 후 선생은 만주에서 단재 신채호, 지청천 장군과 함께
무장독립운동의 큰 그림을 구상했다.
백두산 기슭의 귀틀집에서 그는 지청천을 만나
독립군 재건의 비밀조직 결성을 논의했고,
이 만남은 훗날 무장투쟁의 중심축으로 이어진다.

그는 청년들을 신흥무관학교로 보내며
독립전쟁의 씨앗을 뿌렸고,
이 무렵 한 젊은 청년이 그를 찾아왔다.
그 청년의 이름은 김원봉이었다.

김대지는 그에게 싸움의 방향과 정신을 가르쳤다.
“의열은 분노가 아니라, 정의의 불꽃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김원봉은 그의 추천으로 의열단 단장이 되었고,
조국의 독립운동사에 거대한 불꽃을 남겼다.
그 불꽃의 밑그림을 그린 이가 바로 김대지였다.

이후 그는 의열단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무기와 폭탄을 조달하고, 작전의 핵심 방향을 설계했다.
그러나 함께 싸우던 동지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김동삼은 밀정의 손에 붙잡혀갔고,
김좌진은 공산주의자의 총탄에 쓰러졌다.
그 충격 속에서 김대지는 깊은 병을 얻었다.

지병과 가난, 가족의 연이은 죽음.
모든 것을 잃고도 그가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건
‘독립’이었다.

1942년 10월 26일,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광복은 보지 못했지만,
그의 정신은 해방의 날 태극기 속에서 되살아났다.

-

작가의 글

복원된 그의 사진을 바라보면
눈빛 속에서 시간의 먼지를 걷어내는 듯한 순간이 있다.
지친 얼굴이지만, 그 안엔 ‘끝까지 버티겠다’는 단단한 빛이 있었다.

조국보다 앞선 안위는 없었고,
동지보다 높은 자리는 없었던 사람.
김대지 선생은 그렇게 불타오르다, 조용히 스러졌다.

나는 지금, 그의 초상을 다시 불러낸다.
세월이 바래지 못한 신념의 색을 되살리는 일.
그것이 내가 사진으로 독립운동가들을 복원하는 이유다.

- 사진작가 김정안, 「빛으로 부활한 독립운동가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