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정 선생 (1896. 6. 10 ~ 1947. 10. 27)

2025. 10. 28. 23:56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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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정 선생 (1896. 6. 10 ~ 1947. 10. 27)

교사에서 장군이 된 예술가

이상정의 삶은 하나의 장르로 정의할 수 없다.
그는 화가이자 시인, 교사이자 장군, 그리고 독립운동가였다.
그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예술과 혁명, 이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한국 근대사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1896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네 형제 중 장남이었다.
그의 가문은 한국 근대문화사의 거대한 수맥이었다.
둘째 동생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남긴 시인이었고,
셋째 이상백은 한국 사회학의 선구자,
넷째 이상오는 수렵가이자 저술가였다.
이들 형제는 각자의 길에서 민족의 근대화를 향해 나아갔으며,
그 중 맏형 이상정은 가장 치열하게, 그리고 가장 멀리 떠난 사람이었다.

1910년,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역사학과 미술, 군사학을 익혔다.
특히 예비군사교육기관인 성성중학교에서의 학업은
그가 훗날 중국군에 복무하며 항일전선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1917년, 귀국한 그는 대구 계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했다.
이후 정주의 오산학교, 평양의 광성고보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그는 붓과 분필로 젊은이들의 정신을 깨우던 교육자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에게 예술가로만 머무를 여유를 주지 않았다.

1925년, 그는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그는 운명 같은 인연을 만난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인 권기옥이었다.
두 사람은 이듬해 결혼했고,
이후 광복의 날까지 내몽고, 베이징, 상하이, 난징, 충칭을 넘나들며
‘부부 독립운동가’로서 삶을 함께했다.

이상정은 중국 국민당 펑위샹(馮玉祥) 군의 참모부에서 활동하며
한중 연대의 교두보를 다졌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에는
중국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 교관으로 부임해
전술과 지휘를 가르치며 항일의 전선을 확장시켰다.
그의 강의실은 단순한 군사학교가 아니라,
식민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한 정신의 훈련장이었다.

그는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을 주도하며
한국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위해 앞장섰다.
1942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선출되고,
임시정부 외무부 외교연구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임시정부의 개조와 통합을 주장하며
더 강력한 독립운동 체계를 세우기 위해 헌신했다.

중국군이 한국광복군의 자주적 활동을 제한하려 할 때,
이상정은 단호히 맞섰다.
그에게 독립운동은 타국의 도움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을 쟁취하는 일이었다.

광복 후 그는 상하이로 돌아와
현지 한인들의 귀환과 권익 보호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지 두 달 만인 1947년 10월,
그는 뇌일혈로 쓰러져 생을 마감했다.
조국의 해방을 눈으로 보았지만,
그 해방된 나라의 새벽을 오래 바라보지 못한 채였다.

그의 유고집 『표박기(漂泊記)』에는
그가 걸어온 길의 쓸쓸함과 결기가 함께 담겨 있다.
그는 떠돌았지만, 그의 방황은 민족의 길 위에 있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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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글

이 순간 한 장의 초상 속에 담긴 수많은 얼굴을 보고 있다.
교단 위의 교사, 붓을 든 예술가, 군복을 입은 장군,
그리고 권기옥 선생과 나란히 선 한 남편의 얼굴.

그의 인생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 같았다.
격랑의 시대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검은 선으로 세상을 그려나간 한 예술가의 삶.

그가 남긴 유고 『표박기』의 제목을 오래 바라본다.
‘표박’이란 떠돎이지만, 그의 떠돎은 결코 유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길 위의 신념’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신념의 얼굴을 복원하며 나는 깨닫는다.
기록은 남지 않았다 해도,
그의 눈빛 속 신념은 여전히 우리를 향해 말을 건넨다는 것을.

- 사진작가 김정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