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준 선생 (1895. 5. 2 ~ 1959. 10. 27)

2025. 10. 29. 00:01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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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준 선생 (1895. 5. 2 ~ 1959. 10. 27)

항일전의 선봉에 선 정통 무장

권준의 이름은 독립운동사 속에서 유난히 묵직하게 남는다.
그는 ‘의열단’의 일원으로서 항일투쟁의 최전선에 섰고,
교육자이자 군인으로, 또 외교관으로서 조국 독립의 실질적 기반을 닦았다.
그의 삶은 총과 펜, 결단과 사색이 교차한,
조용하지만 강렬한 저항의 역사였다.

1895년, 일제의 발톱이 조선을 서서히 짓누르기 시작하던 해에 태어난 권준은
젊은 시절부터 시대의 흐름을 냉정히 바라보았다.
그에게 민족의 해방은 감정이 아니라 ‘의무’였고,
조국의 독립은 이상이 아니라 ‘책임’이었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을 뒤흔들던 그때,
권준은 만주로 건너가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만났다.
그곳에서 그는 김원봉, 윤세주 등과 함께 의열단(義烈團) 을 결성한다.
의열단은 무장투쟁의 선봉이었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의로운 분노를 행동으로 옮긴 단체”였다.
권준은 그 중심에서 자금 조달과 무기 지원,
정보 전달 등의 실질적 활동을 주도하며
의열투쟁의 조직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그는 중국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에 입학해 정규 군사 교육을 받았다.
이 학교는 손문(孫文)과 장개석(蔣介石)이 세운 근대 중국의 핵심 군사교육기관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한중연대의 통로로 삼은 곳이었다.
권준은 이곳에서 현대전술과 지휘학을 익혔고,
이를 바탕으로 독립군 조직의 체계를 강화하는 데 헌신했다.

그는 중국군 장교로 복무하면서도
언제나 ‘조국의 독립’을 최우선에 두었다.
1930년대 초, 만주와 중국 전역에 흩어진 독립군 단체들은
각기 분열과 고난 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때 권준은 이들을 하나로 묶기 위한 인재 양성에 눈을 돌렸다.
그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교관으로 활동하며
무장 독립운동을 이끌 차세대 지도자들을 양성했다.
그의 교단은 단순한 군사훈련장이 아니라
“조국의 해방을 준비하는 혁명학교”였다.

해방이 가까워오자, 그는 임시정부의 핵심 요직인
내무부 차장으로 선임되어 중국 내 교민사회를 보호하는 일에 헌신했다.
식민지 시절부터 독립 이후까지,
그의 활동은 언제나 ‘국가의 기초’를 세우는 일에 닿아 있었다.
그는 싸웠고, 가르쳤으며, 보호했다.
그것이 권준이 선택한 참된 무장의 길이었다.

1959년 10월 27일, 그는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무장독립운동의 정통’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의 투쟁은 폭탄과 총탄의 소리보다 더 깊은 울림으로,
조국의 자주를 향한 의지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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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글

바윗 돌 같은 침묵.
그 침묵은 단순한 고요가 아니었다.
오랜 세월 싸워온 자만이 품을 수 있는, 깊고 단단한 침묵이었다.

의열단의 이름은 ‘의로울 義’와 ‘사나움 烈’로 이루어져 있다.
권준 선생의 삶은 바로 그 두 글자였다.
정의로움과 용맹함, 그러나 그것을 떠들썩하게 드러내지 않는 절제된 강인함.

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조국의 해방이 단지 격렬한 전투의 결과가 아니라,
수많은 이름 없는 헌신의 축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가 남긴 자취는 먼 만주벌판의 바람 속에 흩어졌지만,
그의 신념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총은 잠들었어도, 정신은 아직 깨어 있다.”

- 사진작가 김정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