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0. 29. 00:07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조완구 선생 ( ~ 1954. 10. 27 )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킨 30년
조완구 선생의 이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긴 그림자 속에서 언제나 조용히 빛났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조직과 동지, 조국의 존립을 지켜낸 묵묵한 수호자였다.
그의 삶은 격랑의 근현대사 속에서 오직 하나의 신념으로 이어졌다 —
“나라가 서야 사람도 산다.”
1919년,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조완구는 그 초창기 구성원으로 참여하여 임정의 행정과 외교, 그리고 재정 실무 전반을 맡았다.
그는 총칼보다도 체계와 질서를 통해 독립운동을 지속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독립운동이 단순한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미래의 나라를 세우는 준비이어야 한다는 점을 누구보다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끊임없는 이주와 내부 분열, 그리고 자금난에 시달렸다.
그럴 때마다 조완구 선생은 묵묵히 행정과 조직을 재정비하며 중심을 잡았다.
그는 문서와 기록을 정리하고, 자금을 확보하며, 독립운동가들의 생활 기반을 마련했다.
화려한 전면보다는 보이지 않는 후방에서,
그는 임시정부의 숨통을 이어주는 역할을 자임했다.
1930~40년대,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겨간 뒤에도
조완구는 임정의 주요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광복군과의 연계, 외교 전략, 한중 간 협력 방안을 조율했다.
그의 이름은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임정 내부의 행정 실무와 외교 관계를 유지한 인물로서
그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 뼈대’와도 같았다.
1945년 광복이 찾아왔을 때, 그는 비로소 숨을 고를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곧이어 분단의 현실은 새로운 비극으로 다가왔다.
그가 평생 지켜온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은
해방의 기쁨과 동시에 두 개의 체제로 나뉘어버렸다.
그의 마음속에서 조국은 아직도 미완의 나라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조완구 선생은 평양에 머물던 조소앙 등과 함께 납북되었다.
그곳에서도 그는 ‘통일된 조국’을 염원하며
어떤 정치적 이익이나 권력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생은 철저히 조국의 이름 속에 있었다.
1954년 10월 27일,
그는 “통일을 못 보고 가는 게 한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용성의 중앙병원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육신은 작았고, 몸은 수척했지만
그의 정신은 거대했다 —
30년간 임시정부를 떠나지 않았던 단단한 신념의 사람,
그가 바로 조완구였다.
-
작가의 글
복원된 조완구 선생의 초상 앞에서 오래도록 눈을 떼지 못한다.
화려한 장군의 군복도, 웅변가의 목소리도 없는 얼굴이었다.
그저 단정한 눈빛과 결기 어린 입술이,
‘조용한 헌신의 무게’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는 역사의 전면보다는 뒤편에서
조국의 숨결을 지탱한 사람이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이들이 있었다면,
조완구 선생은 그 불꽃이 꺼지지 않게 바람을 막아준 이였다.
세상은 흔히 ‘영웅’을 찾지만,
역사를 지탱하는 건 언제나 이런 이름 없는 손길들이다.
통일을 보지 못한 한(恨) 속에서도,
조완구 선생은 끝내 나라를 믿었다.
그 믿음이 오늘의 우리가 설 수 있는
가장 단단한 뿌리가 되었음을,
그의 초상 앞에서 새삼 느낀다.
- 사진작가 김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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