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순 선생 (1919. 2. 4 ~ 1998. 10. 27)

2025. 10. 28. 23:49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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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순 선생 (1919. 2. 4 ~ 1998. 10. 27)

바다를 건넌 목소리는 결코 작지 않았다.
총칼 대신 펜과 연설로 맞선 한 사람,
그의 이름은 공백순(孔白淳).
그는 머나먼 타국의 하늘 아래서도, 조국의 해방을 향한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다.

1940년대 초,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격랑 속에 있었다.
그러나 그 혼돈의 한가운데서, 미주 지역의 한인 교민들은 조국의 독립이라는 또 하나의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미주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은 단순히 망명지의 생존이 아니라,
해외에서의 ‘또 다른 전쟁터’였다.
그들은 교민사회의 자치와 단합을 도모하며,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단체에 자금을 보내고,
미국 정부와 국제기구에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했다.

공백순은 바로 그 중심에서 외쳤다.
1942년 2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서 그는 연단에 올랐다.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태평양전쟁에 한국인은 총동원되어, 미국과 연대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할 것이다.”

그의 말은 단순한 연설이 아니었다.
그것은 식민의 멍에에 눌린 한 민족이
세계의 전쟁 속에서도 자신의 이름으로 싸우고자 하는 결의의 외침이었다.

같은 해 12월, 캐나다 퀘벡에서 열린 태평양회의.
이 회의는 전후 아시아의 재편과 일본의 위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공백순은 이곳에서도 한국 대표로 참석해,
조국의 독립 보장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는 세계의 강대국들이 식민지의 미래를 재단하던 그 자리에서,
“한국은 결코 일본의 부속이 아니다”라는
민족의 존재를 세계에 증명하고자 했다.

그의 투쟁은 연설로 그치지 않았다.
1942년부터 1943년까지,
그는 「신한민보(新韓民報)」와 「국민보(國民報)」의 영자판에
한국의 독립에 관한 글을 꾸준히 발표하며
조국의 사정을 세계 언론의 눈앞에 드러냈다.
그리고 1943년, 「독립신문」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한인사회의 지식인들과 함께 독립의 여론을 이끌었다.

그는 끝내 귀국하지 못한 채,
오랜 망명지에서 조국을 그리며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1998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오랜 헌신과 희생을 기려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반세기를 넘어 돌아온 조국의 기억 속에서,
공백순이라는 이름은 비로소 하나의 빛으로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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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글

태평양 건너 낯선 땅에서,
한 인간의 목소리가 어떻게 한 나라의 외침이 될 수 있을까.
공백순 선생의 삶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나는 오래된 신문 속 글자들 사이로 바다 내음를 맡았다.
연단 위에서 외쳤던 그의 목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지만,
그 울림은 여전히 사진 속 눈빛으로 남아 있다.

기록의 복원이란, 단지 잃어버린 색을 되찾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지워진 이름들을 다시 불러내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이름들이 우리 곁에서 다시 살아 숨 쉬게 하는 일이다.

- 사진작가 김정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