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1. 3. 11:29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정태진(丁泰鎭, 1903.7.25 ~ 1952.11.2)
말과 글을 피로써 지킨 사람 - 조선어학회의 한글학자
“말과 글은 한 민족의 피요, 생명이요, 혼이다. … 이 땅의 모든 애국자는 다 함께 일어나 우리의 말 우리의 글을 피로써 지키자!”
- 정태진, 『말과 글을 피로써 지키자!』 중에서.
정태진 선생은 ‘말과 글’을 지키는 일을 삶의 중심으로 삼은 사람이었다.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미국에서 유학을 마친 뒤, 다시 고향 땅의 언어와 아이들을 위해 교단에 섰다 — 그 교육자 경험은 훗날 그의 한글운동과 사전 편찬 활동의 밑바탕이 되었다.
1925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함흥의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한 정태진은, 1927~31년 미국 유학(우스터·컬럼비아) 후 귀국하여 다시 교단에 복귀했다. 그가 가르치던 학교와 제자들 속에서 이루어진 ‘조선어 교육’과 생활 언어에 대한 고민이 결국 ‘큰사전’ 편찬이라는 더 큰 작업으로 이어졌다.
1930년대 말·40년대 초, 일제의 탄압과 전시체제 강화 속에서 ‘조선어학회’는 한글을 지키고 우리말을 체계화하려는 학자·교사들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정태진은 그 현장의 전임위원으로서 원고 정리와 내용 자문, 교육자 양성 등 실무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가 편찬에 참여한 ‘큰사전(조선말 큰사전)’은 한글 어휘 체계를 정리하는 작업이었고, 이는 곧 민족의 말살 정책에 맞서는 문화적 저항이었다.
그러나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지면서 일제는 ‘한글 교육’의 현장까지 검열과 탄압으로 몰아넣었다. 함흥 영생여고의 학생 일기에서 비롯된 단서가 확대되어 조선어학회 관련자들이 체포되었고, 정태진도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는 옥중에서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이 사건은 단순한 학술검열을 넘어 ‘언어를 통한 민족정체성 복원 시도’에 대한 조직적 탄압이었다.
출옥 이후 정태진은 죄책감과 상처를 안고서도 한글운동에 매진했다는 평을 받는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남긴 상처와 ‘사건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자책감은 그를 더욱 한글 보급과 교육에 헌신하게 만들었다는 학술적 해석이 있다. 해방 뒤에는 ‘큰사전’ 편찬 작업을 재개하는 데 참여하며 우리말 사전 편찬의 연속성을 이어가려 했다.
정태진의 발자취는 파주 지역 기념 사업으로도 이어졌다. 고향 파주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관과 지역의 기억이 자리한다. 한글과 교육, 그리고 민족의 언어를 지키려던 그의 노력은 오늘의 우리말 자료·사전 작업의 역사적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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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글 - 말의 얼굴을 복원하다
그의 입술에 새겨진 결기를 본다. 그 결기는 비바람과 탄압 속에서도 한 글자도 잃지 않겠다는 약속의 선(線)이었다.
사진 한 장이 말해주지 못하는 것은 많다. 그러나 얼굴의 주름, 눈가의 그림자, 손의 각도 — 그 모든 것이 그가 하루하루 ‘말을 지키는 일’을 얼마나 육체적으로 견뎌냈는지를 말해준다.
‘사전’이란 건 결국 사람들의 숨결을 한데 모은 기록이다. 정태진 선생은 그 숨결을 모으는 데 몸을 바쳤고, 감옥에 갇힌 그 시간조차도 그의 뜻을 꺾지 못했다. 나는 그가 남긴 눈빛을 복원하며, 오늘 우리의 말이 얼마나 연약하고 동시에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묻는다.
그의 말과 글을 지키려던 손길을 사진 위에 얹어두는 일 — 이 작업은 나에게 하나의 예배이고, 약속이며, 이어감이다.
- 사진작가 김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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