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1. 6. 09:50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가 남상목 선생 (1876.4.12 ~ 1908.11.4)
왜적들을 향한 의로운 총
그의 젊음은 억눌림에 맞선 한 발의 총성이었다.
조선 땅 위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던 1904년, 러일전쟁의 불길이 번지며 조선의 산과 들이 일본의 전쟁 자원으로 짓밟히고 있었다.
그 시기, 충청의 젊은 농부 남상목은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았다.
일제는 그가 살던 지역의 수목을 모조리 베어내고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운반하게 했다.
피땀 어린 노동에 단 한 푼의 임금도 지급되지 않았다.
그 참상을 목도한 그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
감독관으로 온 일본인 나가이를 사람들 앞에서 때려눕혔고, 이 사건으로 헌병대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 고통은 그를 꺾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저항의 불씨를 깨웠다.
1905년 을사늑약, 나라의 외교권이 일제에 강탈당하자, 남상목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1906년 충북 제천의 의병장 이강년 부대에 합류해 항일전에 뛰어들었고,
이듬해에는 스스로 의진을 조직하여 전선의 한가운데 섰다.
1908년 8월, 경기도 용인 용곡천 일대에서 50여 명의 동지를 이끌고 새로운 의병부대를 꾸려냈다.
그는 동지들을 모아 말했다.
“우리가 지키려는 것은 땅도, 재물도 아니다. 조선의 혼이다.”
그해 가을, 경기도 음성에서 벌어진 전투는 역사에 남았다.
패배로 끝났으나,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그 이름을 두려워했다.
그의 부대는 용인에서 충주까지, 낮에는 숨어서 길을 닦고 밤에는 매복해 일본군 보급로를 끊었다.
농부의 손이었던 그의 손은 이제 민족의 총을 쥔 손이 되었다.
그러나 독립의 길은 끝내 그를 잡아삼켰다.
1908년 11월, 판교의 가족을 잠시 만나러 가던 중 밀정의 밀고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연일 고문을 당했다.
의병장으로서의 위치는 그에게 더욱 혹독한 시련을 안겼다.
마침내 장이 파열되어, 1908년 11월 4일, 고통 속에서도 굳게 입을 다문 채 순국했다.
그의 손에는 아직 총을 쥔 듯한 긴장감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손끝이 향하던 곳은 언제나 왜적이 아닌, 빼앗긴 조국의 하늘이었다.
-
작가의 글
그의 삶은 불타는 분노가 아니라, 식지 않는 정의였다.
억울함보다 의로움이 먼저였고, 생보다 조국이 더 컸다.
그가 휘두른 총은 단 한 발이 아니라
모든 짓밟힌 백성의 심장에서 터져 나온 함성이었다.
피멍이 든 손끝으로,
그는 조국의 이름을 붙잡고 있었다.
그의 죽음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부르는 ‘의병’이라는 말 속에 살아 있다.
그 날의 총성이 아직 멀리 메아리친다.
산과 들에 스민 바람 속에서
그의 의로움이 다시 깨어난다.
사진작가 김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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