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권인규 선생 (1843.7.12 ~ 1899.11.6)

2025. 11. 6. 22:39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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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권인규 선생 (1843.7.12 ~ 1899.11.6)

3대에 걸친 독립운동, 구국의병 독립 혼을 지키다

헌종 때 강릉에서 태어난 권인규 선생은 평생을 후학을 기르며 올곧은 유학자의 삶을 살았다.
그의 집은 늘 책의 향기와 바람의 소리가 어우러져 고요했으나, 1895년 을미사변의 참혹한 소식이 들려오자 그 고요는 단숨에 깨져버렸다. 조국의 왕후가 왜적의 칼날 아래 쓰러지고, 머리카락을 자르라는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선생의 가슴에는 맹렬한 불길이 타올랐다.

“비록 늙고 병들었을지라도, 몸을 던져 섬 오랑캐를 몰아내리라.”
그 다짐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선생이 일으킨 의병의 명분은 단순한 복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척사부정(斥邪扶正)’, 사악한 것을 물리치고 올바름을 세우는 도의적 결단이었다.
그에게 의병은 단순한 무장투쟁이 아니라 **‘의리의 실천’**이었다.
하늘이 정의로운 뜻을 돕는다는 믿음으로, 선생은 군중 앞에 섰고,
그 손에는 붓이 아니라 칼이, 그 입에는 학문의 가르침이 아니라 격문의 울분이 담겨 있었다.

그는 민용호 의진에 참여해 여주, 원주, 평창, 강릉 등지에서 항일의 봉화를 들었다.
의진은 추운 겨울에도 산속에서 군량을 아끼며 싸웠고,
선생은 독자적으로 **‘창의포고문’**을 발표해 동포들의 마음을 깨웠다.
그 글 속에는 시대의 절규가 담겨 있었다.

“아! 우리 5백년 대소 신민들아,
저 왜놈의 극악함은 어찌 차마 더 말할 수 있겠는가.
강산에는 아직도 두 능(陵)의 원수가 남아 있고,
천지에는 또 8월의 변고가 일어났으니,
설사 그 놈들의 배를 쪼개고 그 놈들의 간을 씹지 못할망정
또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깎으며 그 놈들의 호령을 따른단 말이냐.
원통하고 원통하다.”

이 포고문은 단지 선생 한 사람의 분노가 아니라,
그 시대 모든 백성의 울음이었고, 민족의 혼이었다.

그의 의로운 뜻은 대를 이어 이어졌다.
아들 권종해는 1907년 후기 의병기에 이강년 의병과 함께 싸웠고,
손자 권기수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다 옥중에서 숨을 거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세 세대가 생명을 걸었으니,
그 가문이야말로 ‘의(義)’의 뿌리이자 ‘혼(魂)’의 전승이라 할 수 있다.

일제는 그 가문을 잔혹하게 짓밟았고,
남겨진 가족들은 고문과 학살, 투옥의 고통 속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았다.
나라가 사라진 시절, 권인규 선생과 그 후손들의 의병정신은
조용히 그러나 단단히 이 땅의 역사 속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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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글

역사는 때때로 한 인간의 의지로 다시 서기도 한다.
권인규 선생이 보여준 결기는 시대의 비바람을 뚫고 세월을 건넜다.
한 사람의 분노가 한 가문의 신념이 되고,
그 신념이 결국 한 민족의 정신이 되었다.

그들의 피는 강물처럼 흘러, 오늘 우리가 딛고 선 이 땅을 적셨다.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마음이 숙연해지는 것은,
그분들의 희생이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를 지탱하는 ‘정의의 숨결’이기 때문일 것이다.

빛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세월의 안개 속에서도 묵묵히,
그 길 위에서 다시 타오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