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1. 21. 09:59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가 신돌석 선생 (1878.11.3 ~ 1908.11.18)
평민에서 의병장으로, ‘태백산 호랑이’가 되기까지
1895년 겨울, 한반도의 들판과 산맥에는 울분에 찬 민중들의 숨결이 바람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평민 출신의 한 청년 역시 그 바람 속에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신돌석.
그는 양반 가문도, 유학자 가풍도 아닌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청년의 가슴 속에는 신분이 깎아내릴 수 없는 뜨거운 의협심과 시대의 부름을 알아채는 예민한 감각이 있었다.
- 평민 청년의 첫 봉기
18세.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영덕에서 첫 의병을 일으킨다.
“나라가 무너지고 있는데, 신분이 무슨 소용인가.”
이 단호한 결심은 이후 수많은 농민들에게 항일 의식을 깨우는 불씨가 되었다.
신돌석이 활동하던 초기 의병전은 대부분 양반 유생들이 주도했기 때문에, 평민이 의병장을 맡는다는 것은 파격이었다. 그러나 그의 전략과 리더십은 출신을 뛰어넘었다.
그는 산맥의 지형을 읽었고, 농민들의 삶을 알았고, 조용히 그러나 치밀하게 전투력을 키웠다.
- ‘태백산 호랑이’의 탄생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그는 다시 봉기한다.
그의 부대는 소수였지만 움직임은 번갯불처럼 빠르고, 흔적은 물처럼 사라졌다.
울진에서 일본 선박 여러 척을 격침시켰고, 강원도 동해안 일대와 경북 내륙, 원주까지 작전을 확대했다.
일본군은 그를 ‘도저히 잡을 수 없는 적’이라 불렀고
민중은 그를 **“태백산 호랑이”**라고 추앙했다.
‘호랑이’의 별명은 단순한 무용담이 아니라, 신돌석 의병장의 전술을 상징한다.
매복, 야습, 유격전, 기습 후 신속한 철수.
일제는 수차례 대규모 토벌대를 꾸렸지만 그는 매번 사라졌다.
-연합작전과 민중의 신뢰
그는 재기의 순간마다 더 단단해졌다.
김하락 의병대가 붕괴된 뒤에도 동요하지 않았고,
안동의 유시연 의병장과 다시 연합하여 경상도·강원도 전역에 항일투쟁의 불을 이어갔다.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무시받던 시대였지만,
신돌석 앞에서는 양반 출신 의병장들까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의지는 신분을 넘어서는 진정한 지도력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었다.
-비극적인 최후
1908년 겨울, 영덕 눌곡.
혹독한 추위 속에서 그는 일본의 사주를 받은 밀정에게 기습을 당해 순국한다.
적군의 총칼이 아닌, 민족을 배신한 이들의 손에 쓰러진 그의 죽음은 의병사 전체에서 가장 비통한 장면 중 하나로 남았다.
하지만 신돌석 의병장은 살아생전 이미 수많은 농민들에게 말 없이 가르쳤다.
“독립은 지식인의 것이 아니라, 나라를 사랑하는 모든 이의 것”이라고.
-작가의 글
한 사람의 신분이 역사를 가르는 기준이 되던 시대에, 그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지켜냈다.
양반이 아닌 청년 농민의 손에서 시작된 불씨가 태백산맥을 넘어 민중의 마음을 흔들었다.
신분보다 나라를, 생명보다 의리를 먼저 두었던 그의 발자국은 오늘의 산과 들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 흔적을 잊지 않기 위해 이 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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