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1. 21. 09:56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 (1867.3.17~1932.11.17)
-봉건을 넘어, 나라의 내일을 향하여-
몸도 재산도, 심지어 가문의 영광까지 조국에 바친 사람**
압록강을 건너던 날, 이회영 선생은 뱃사공에게 전 재산을 털어 건네며 말했다.
“앞으로 수많은 조선의 젊은이들이 이 강을 건널 걸세. 그들을 잘 부탁하네.”
그 한마디는 조국의 운명이 기울던 시대에 던진 유언 같았고, 동시에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이미 끝낸 이의 담담한 결의였다.
조선 후기 최고 명문가, 오성과 한음의 이항복 후손.
조선 말 열 손가락 안에 들던 대부호.
동대문·중랑·구리·남양의 광막한 토지를 가진 집안.
그러나 그 막대한 부와 신분은 나라를 잃는 순간 아무 의미가 없었다.
기득권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책임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 집안만큼 선명하게 증명한 경우는 세계사에서도 드물다.
-
■ 2조 원을 쏟아 조국의 군대를 세우다 — 신흥무관학교의 설립
1910년 강제병합 직후, 여섯 형제는 한 자리에 모였다.
모두가 알았다. 조선은 이제 스스로 무장하지 않으면 다시 서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은 말없이 결론을 내렸다.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쓴다.”
단 한 사람도 반대하지 않았다.
처음 계산으로는 약 600억 원, 실질 가치로는 2조 원이 넘는 재산이었다.
그 돈으로 세워진 곳이 바로 신흥무관학교.
이곳에서 배출된 3500명의 청년들은 훗날 3·1운동의 기수, 북로군정서의 장교, 청산리대첩의 영웅들로 자랐다.
학비도, 식비도 모두 무상이었다.
청년들이 더 멀리, 더 단단하게 싸울 수 있도록 이회영 일가는 몸과 가문을 분해해 그들에게 내어주었다.
압록강을 건너던 날, 선생이 건넨 ‘뱃삯’은 조국 독립을 향한 첫 씨앗이었다.
그 강을 실제로 수십만 명의 조선 청년들이 지나갔고, 신흥무관학교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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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문의 희생은 끝이 없었다
위대한 희생은 한 사람의 결심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 집안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을 초라하게 만들 정도의 무게를 shoulders로 짊어졌다.
• 이석영: 서울 동대문·중랑·구리 일대의 땅을 모두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 상하이에서 굶어 죽음.
• 이철영: 신흥무관학교 교장. 영양실조와 병으로 사망.
• 이호영: 만주에서 독립운동 중 두 아들과 함께 실종.
• 이시영: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 광복 후 부통령. 독재에 맞서 부통령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옴.
• 형제들의 아들들: 다수가 전선에서 전사, 혹은 밀정 처단 후 사망.
• 6형제 중 5명 순국. 돌아온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이회영 선생의 가문은 조국을 위해 피로 쓴 족보를 남겼다.
이런 희생을 강요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저 “나라가 없으면 가문도, 삶도 없다”는 신념이 그들을 한 방향으로 움직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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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키스트로서의 선택 —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믿음
이회영 선생은 누구보다 높은 신분을 가졌지만, 누구보다 ‘평등’을 믿었다.
그래서 임시정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졌다.
그는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조차 자리와 권위를 둘러싼 갈등이 생길 것을 우려했다.
“정부가 생기면, 권력을 향해 분열이 생긴다.”
그의 예측은 결국 사실이 되었다.
이회영은 권력이 아니라 ‘자유’를 선택했다.
지배하는 독립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서는 독립을 꿈꿨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아나키즘을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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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 고문실에서 스러진 육신, 그러나 부서지지 않은 정신
1932년 11월, 밀고에 의해 체포된 선생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미 영양실조로 뼈만 남은 몸.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인물이었기에, 일본은 더 잔혹하게 선생을 다뤘다.
“생과 사는 다같이 인생의 일면인데,
사를 두려워해 무엇을 하겠는가.
사명을 다하다 죽는 것이 가장 떳떳하다.”
그 신념 그대로, 선생은 옥중에서 생을 마쳤다.
향년 66세.
광복을 보지 못하고 떠났지만, 그의 헌신이 뿌려놓은 씨앗은 결국 조국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작가의 글
이회영 선생의 삶은 거대한 불빛이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잃고, 끝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조국을 향한 마음만큼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떤 가문은 부로 기억되고, 어떤 가문은 권력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이 가문은 오직 ‘헌신’으로 남았다.
어떤 역사 앞에서도 희미해지지 않을 불씨,
이 땅에 다시 나라가 서는 길을 밝혀준 빛이었다.
그의 결단과 그 집안의 희생이 품은 무게를 기억하는 것,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작은 예의이자, 이 기록의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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