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1. 21. 16:03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가 전명운 선생 (1884.6.25 ~ 1947.11.18)
미국 한복판에서, 조국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방아쇠를 당긴 청년
1908년 3월 23일 새벽.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리 부두의 공기에는 이질적인 긴장감이 떠올라 있었다.
곧 일본 외교고문이자 친일 선전의 중심축이던 **스티븐스(Durham W. Stevens)**가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를 조준한 한 조선 청년이 있었다.
그가 바로 전명운이었다.
-조국을 떠나 유학길에 오른 청년,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전명운은 가난하지만 학문을 사랑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국이 흔들리는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배워서 조국을 일으키겠다”는 꿈 하나로
머나먼 태평양을 건넜다.
유학길에서 그가 본 것은
-일본의 침탈,
-자주권을 잃어가는 조국,
-그리고 미국에서 벌어지는 친일 선전이었다.
그 중심에 대한제국 외교고문 스티븐스가 있었다.
그는 일본의 앞잡이로 변하여
“한국은 일본의 보호를 원한다”는 허위 발언을 계속 퍼뜨리고 있었다.
나라가 스러져 가는 동안, 먹고 사는 일 하나로 침략을 정당화하던 자.
전명운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미국에 와서 학업을 닦아가지고
대한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는데
스티븐스가 한국을 배반하였다.
나는 애국심으로 그 놈을 포살하려고 했다.”
법정에서 남긴 이 한 문장은
그의 결단이 ‘분노’가 아닌 ‘책임’에서 비롯되었음을 증명한다.
-샌프란시스코 페리 부두 — 의거의 순간
1908년 3월 23일.
스티븐스는 샌프란시스코역에 도착했다.
전명운은 군중 사이에 섞여 있었다.
손에는 권총 한 자루, 심장에는 조국을 향한 뜨거운 맹서 하나.
총성이 울렸다.
스티븐스는 쓰러졌고,
전명운은 곧바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 의거는 단순한 ‘암살 시도’가 아니라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제로 침탈당한 뒤 전 세계에 퍼진 첫 항일 메시지였다.
샌프란시스코 전역의 신문들이 그의 의거를 대서특필했고,
그 이름은 태평양을 넘어 조국까지 전해졌다.
-법정에서 다시 총을 든 신념
재판장은 그에게 “왜 그랬는가”를 물었다.
전명운 선생의 대답은 군더더기 없는 단 한 문장이었다.
“조국을 배반한 자를 벌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다른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
정치도, 시대도, 자신의 젊음도 핑계 삼지 않았다.
“조국 앞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재판은 미국 교민 사회를 뜨겁게 달궜고,
수많은 재미 한인들이 그의 변호를 위해 모금 활동에 나섰다.
그 열기는 곧 안중근 의사, 장인환 의사, 박용만, 이승만, 대한인국민회 등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결집을 이끌어냈다.
전명운의 총성은
미주 독립운동사의 시작을 알린 일종의 신호탄이었다.
-그 후의 삶, 그러나 기억되지 못한 고독
전명운 선생은 이후 오랜 세월을 미국에서 조용히 살아갔다.
광복의 순간을 멀리서 지켜보았고,
1947년, 홀연히 생을 마쳤다.
수많은 이들이 그의 의거를 기억했지만
그의 최후는 조용했다.
그러나 그가 쏘아 올린 총성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연대기 속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는 한 획이 되었다.
-작가의 글
생의 절정에서 조국을 위해 스스로를 던진 청년이 있었다.
그의 방아쇠는 증오가 아닌 책임에 의해 당겨졌고,
그 총성은 멀리 떨어진 조국의 심장을 깨우는 외침이 되었다.
스스로의 젊음을 희생하여 시대의 어둠을 가르려 했던 그의 선택이
오늘의 우리가 누리는 자유 위에 놓여 있음을
기억하며 이 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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