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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397)

  • 독립운동가 박상진 선생(1884.12.7~1921.8.13)

    독립운동가 박상진 선생(1884.12.7~1921.8.13) 혁명적 독립운동단체 대한광복회를 조직하다 오인(吾人)은 대한독립광복(大韓獨立光復)을 위하여 오인의 생명을 희생에 공(供)함은 물론, 오인이 일생의 목적을 달성치 못할 시는 자자(子子) 손손(孫孫)이 계승하여 수적(讐敵) 일본을 완전 구축하고 국권을 회복할 때까지 절대 불변하고 결심 육력(戮力)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서고(誓告)함. - 1915년 선생이 주도한 대한광복회의 결의문에서 -

    2024.08.13
  • 독립운동가 김한종 선생(1883.1.14~1921.8.11)

    독립운동가 김한종 선생(1883.1.14~1921.8.11) 일본 헌병경찰들의 눈길 피해 모았던 피 같은 독립군 자금 우리 4천년 종사는 회진(灰塵)되고 우리 2천만 민족은 노예가 되었다. 섬오랑캐(島夷:일제)의 악정폭행(惡政暴行)은 일가월증(日加月增)하니 이것을 생각하면 피눈물이 끓어올라 조국을 회복하고자 하는 염(念)을 금할 수 없다. 이것이 본회가 성립된 소이(所以)이니, 각 동포는 그 지닌 바 능력을 다해 이것을 돕고, 앞으로 본회의 의기(義旗)가 동쪽에 오를 것을 기대하라. 김한종 선생은 충효의 전통을 지닌 사대부 집안의 독자로 태어났습니다. 선생의 아버지인 김재정 의사는 의병장 민종식의 휘하에서 활약해 홍주성 공략에 큰 공을 세운 분입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충효사상을 중요시하게 자..

    2024.08.11
  • 독립운동가 김홍일 선생(1898.9.23~1980.8.8)

    독립운동가 김홍일 선생(1898.9.23~1980.8.8) 러시아와 만주를 넘나들며 독립군을 이끌다. 오산학교 졸업 후 독립운동 위해 상해로 망명한후 독립군에 합류, 병사들을 이끌고 시베리아행을 감행하였다. 병기창 주임으로 근무하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필요한 탄약을 제공했고 중국인 상차도와 함께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에 사용된 폭탄을 직접 제조하였다. 훗날 김구 주석의 요청으로 한국광복군 참모장으로 취임했다. 1945년 6월 1일 광복군 참모장에 부임한 뒤, 선생은 김구 주석과 지청천사령관을 도와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합작하여 진행되던 독수리 작전(Eagle Project)에 힘을 쏟았다. 이는 미국전략정보국의 지원 아래 광복군 요원을 잠수함이나 항공기로 국내에 투입시켜 적정을 탐지하고 공작 거점을 확보..

    2024.08.08
  • 독립운동가 박태규 선생 1897. 4. 8 ~ 1948. 8. 3

    독립운동가 박태규 선생 1897. 4. 8 ~ 1948. 8. 3 선생은 경남 통영 사람으로서 1928년 경상남도 평의원인 김기정(金淇正)이 도평의회 석상에서 매국적 발언을 하자 이에 분개하여 시민대회를 개최하는 등 애국활동을 행하다 옥고를 치루셨다. 경남 도평의원인 김기정은 1926년 및 1927년의 각도 평의원회 석상에서 한국인 교육의 폐지와 우리말 통역의 철폐를 주장하는 매국적 발언을 한 바 있었다. 이와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김원석(金元錫)은 1927년 3월 매족상습범(賣族常習犯) 김기정을 징토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내용의 선전전단 500매를 인쇄하여 경남 통영읍(統營邑)의 주민들에게 배포하였다. 이어 박봉삼(朴奉杉), 박태근(朴泰根) 등은 매국발언의 진상을 조사한 후 3월 ..

    2024.08.04
  • 독립운동가 안희제 선생(1885.8.4~1943.8.3)

    독립운동가 안희제 선생(1885.8.4~1943.8.3) 백산상회부터 발해농장까지 독립운동 거점의 설립자 1905년 11월 18일 이 체결되었을때 우리나라의 국망은 풍전등화와 같은 시기였습니다. 일본은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우리의 자주적인 외교권한과 통치권한을 장악하였고 결국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조국이 이같이 망국의 위기에 처하자 선생은 새로운 학문을 익힐 뜻을 집안 어른들에게 밝혔습니다. “국가가 망해 가는데 선비가 어디에 쓰일 것입니까. 고서(古書)를 읽고 실행하지 않으면 도리어 무식자만 같지 못합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학문은 오히려 나라를 해치는 것이니, 내일 당장 경성으로 올라가 세상에 맞는 학문을 하여 국민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 가위 공맹(孔孟)의 도라 할 수 있는데..

    2024.08.04
  • 윤희순 선생(1860~1935) – 최초의 여성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

    윤희순 선생(1860~1935) – 최초의 여성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 윤희순 선생은 1860년 경기 구리에서 태어났다. 16세에 강원 춘천의 집안으로 시집을 갔는데, 시아버지는 춘천 지역 의병장 유홍석 선생이었다. 20년 뒤 36세에 첫 아들을 얻었으나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아버지가 집안을 잘 지켜달라며 본인과 함께 의병에 참여하려는 윤희순 선생을 말렸으나 경기, 강원, 충청 등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확산되자 “비록 여자라 해도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어린 아들을 친척집에 맡긴 뒤 의병에 뛰어든다. 당시는 1896년 도이다. 정말이자 깨어있던 신 여성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시간이 지나 고종황제가 ..

    2024.08.04
  • 독립운동가 박승환 선생(1869.9.7~1907.8.1)

    독립운동가 박승환 선생(1869.9.7~1907.8.1) 대한제국군 강제해산명령에 순국으로 응답한 장교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 (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 -선생의 유서 중에서 조국을 위한 뜻을 품고 무관학교 입학후 고종황제의 최정예 근위부대에서 근무, 국가 보위와 황실 보호 임무를 수행했다. 훗날, 대한제국군 강제해산에 반발, 순국자결로 무장투쟁에 불을 지피다 생을 마감했다. 선생은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라는 유서를 남기고, ‘대한제국만세’를 외친 다음 차고 있던 권총으로 자결, 순국하였다. 선생이 단행한 이..

    2024.08.04
  • 독립운동가 송헌주 선생(1880.10.22 ~ 1965.7.31)

    독립운동가 송헌주 선생(1880.10.22 ~ 1965.7.31) '헤이그특사 3인방' 만 기억되서는 안된다. 그들에겐 숨은 조력자 송헌주 선생이있었다. 우리가 할 일을 아니하고 남의 힘으로 독립을 이룰 수 없다. 송헌주 선생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독립운동가이다. 처음 독립운동가 잊혀진 영웅들을 작업할때 안중근만 기억되서는 안된다. 이토 히로부미 척살에 숨은 조력자 유동하 선생을 기억해야한다고 주변에 말했었는데 송헌주 선생은 거의 같은 논리로 헤이그특사 3인방의 숨은 조력자라고 생각하면 된다. 선생은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지금까지 미주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안창호 선생과 박용만 선생에게 국한되었었다. 특히 이런분들을 국민들이 기억해주길 바라며 잘 읽어주기를 바란다. 1907년 고종황제..

    2024.07.31
  • 독립운동가 엄항섭 선생(1898.10.15~1962.7.30)

    독립운동가 엄항섭 선생(1898.10.15~1962.7.30) 위기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킨 강력한 실천력 일제가 김구 주석에게 내건 현상금은 천문학적인 액수로, 일제뿐만 아니라 중국인과 한국인들도 자칫 현상금에 눈이 어두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엄항섭 선생을 비롯한 최측근뿐이었다. 엄항섭 선생은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 임시의정원 의원, 그리고 주석 판공실 비서로도 활약하고 있었지만,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실무적인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임시정부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나, 임시정부를 위한 일에 선생이 관계되지 않은 일들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임시정부는 위기 때마다 선생의 실천력으로 고비를 넘겼다.

    2024.07.30
  • 고수복 1911 ~ 1933.7.28

    고수복 1911 ~ 1933.7.28 1931년 즈음, 일제는 조선에 인쇄소, 고무공장, 방직공장 등을 지어 대규모로 조선의 남녀 직공을 모집했습니다. 이것은 노동력을 착취하려는 정책이였고, 자연스레 일제의 이러한 노동력 착취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전국 각지에서 생겨났어요. 바로 노동조합의 탄생입니다. 1931년은 고수복 선생이 20살이 되던 해였어요. 선생께서는 같은 해 9월에 종방방직회사 경성제사공장 직공으로 입사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1930년대의 시대상황을 조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데요. 당시에는 일본 독점자본의 진출에 따른 공업화와 노동계급의 양적 성장을 바탕으로한 노동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였어요. 그리고 이러한 노동운동은 오늘날과 같은 노조의 느낌이 아니라 사회주의 운동, 나아가 민족운동으로..

    2024.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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