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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402)

  • 독립운동가 고광순 선생(1848.2.7~1907.10.16)

    독립운동가 고광순 선생(1848.2.7~1907.10.16) 임란 의병장 고경명의 후손, 구한말 의병장으로 다시 칼을 잡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의 혈손(血孫)으로 태어나다 고광순에게는 그가 의병전선의 선봉에 서지 않을 수 없었던 여러 가지 명분이 주어져 있었다. 그 첫째는 일제의 극심한 경제침탈을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을사조약 늑결 후 광무황제의 밀칙이 내려와 있었다는 사실이며, 셋째는 임진왜란 때 순국한 저명한 의병장의 직손으로서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도 의병을 일으켜야 했던 것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청일전쟁을 도발한 직후부터 일제는 대한침략정책을 한층 강도 높게 진행시켜 갔다. 1895년에 들어와 나라에 대변고가 두 번이나 연이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고광순..

    2024.10.16
  • 독립운동가 홍충희 (1878-1946)

    독립운동가 홍충희 (1878-1946) 요약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서 북로군정서 보병중대장을 역임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쓴 독립운동가. 내용 1903년 대한제국 무관학교 보병과를 졸업하고 대한제국 육군부위(陸軍副尉)를 지냈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가운데의 한 사람인 권동진(權東鎭)을 도와 참여한 뒤 김규식(金奎植)·김찬수(金燦洙) 등과 함께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1920년 만주 길림성 왕청현(吉林省汪淸縣)에서 서일(徐一)·현천묵(玄天默)·김좌진(金佐鎭)·김규식·이범석(李範奭)·조성환(曺成煥)·김찬수 등과 중광단(重光團)에서 발전한 정의단(正義團)을 다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하는 데 참여하여 총사령관 김좌진 휘하의 보병중대장으로 독립군 양성에 진력하였다. 1920년 10월 일본..

    2024.10.16
  • 이강년(李康秊) 1858.12.30~1908.10.13

    이강년(李康秊) 1858.12.30~1908.10.13 대한제국기 용소동전투, 갈기동전투, 백담사전투 등에 참전한 의병장. 1880년 무과에 급제해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로서 선전관이 되었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1월 11일 가산을 털어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순검 이호윤(李浩允)·김인담(金仁覃)을 체포해 농암(籠巖) 장터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효수하였다. 이어 제천으로 유인석(柳麟錫)을 찾아가 유인석의 문인이 되고, 유인석 의병부대의 유격장으로서 문경·평천·조령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 해 4월에 장기렴(張基濂)이 거느린 관군과 제천에서 싸워 패해 ..

    2024.10.13
  • 독립운동가 오복원 선생 (1886-미상)

    독립운동가 오복원 선생 (1886-미상) 요약 대한제국기 이완용 암살모의에 가담한 항일운동가. 내용 평안남도 강동 출신. 이완용(李完用) 암살 당시 천도교인이자 대한의원부속의학교 생도였다. 1909년 여름, 이재명(李在明)이 우리나라를 일본의 속국화하려는 일진회장 이용구(李容九)를 살해하여야 한다는 데에 뜻을 합하여, 합방협약을 끝내 체결하고 만 이완용을 살해할 거사에 가담하였다. 거사 준비에서 박태은(朴泰殷)·이응삼(李應三)과 더불어 자금조달 책임을 맡았던 까닭에 자금 주선을 위하여 천도교교리강습소를 시찰한다는 명분의 위임장을 지니고 1909년 11월말에 평양에 갔다. 그 결과 약 50원의 자금을 조달하여 거사 때 입을 학생복과 무기 등을 구입하였다. 그러나 이완용암살사건이 실패로 돌아가 1910년 5..

    2024.10.11
  • 박자혜 선생 – 여성독립운동가

    박자혜 선생 – 여성독립운동가 2009년 7월 15일 충북 청원에서 박자혜의 사후 66년만에 처음으로 추모제가 열렸다. 대한간호협회는 국가보훈처가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박자혜 간호사에 대한 추모식을 개최했다. 이날 오후 1시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묘역에서 열리는 추모식은 박자혜 선생의 숭고한 뜻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마련되었다 이덕남: "이제야 시어머니를 제대로 보는 것 같다. 어머니는 숨겨진 우리의 독립운동사, 그 절반의 그늘이다. " 박자혜 선생은 1895년 경기도 고양군 (지금의 고양시)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궁중 나인으로 생활했다. 나인은 왕과 왕비의 수족을 챙기는 신하로, 환관과 비슷한 개념 선생은 1910년 일제가 한일병탄조약으로 조선 궁중을 없애자 궁녀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

    2024.10.10
  • 문창범 선생. 1870 ~ 1938

    문창범 선생. 1870 ~ 1938 문창범 선생은 대한민국의 임시정부 초대 교통총장으로 임명되어 독립을 위해 노력한 독립운동가입니다 . 문창범 선생은 함경북도 경원에서 태어났고 , 8 살이 되던 1877 년 부모님을 따라 러시아의 우수리스크 인근의 쁘질로프카 (육성촌 )으로 이주하였습니다 . 이곳에서 선생은 자수성가하여 재력가가 되었습니다 . 선생은 자신의 재력을 독립운동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한인학교를 설립하고 등 한글신문 발간을 지원했고 , 연해주지역의 한인 교육 및 언론발전을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 경술국치 이후 문창범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권업회가 조직되자 우수리스크지회 대표로 활약하였고 , 해외독립운동을 이끌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일명 ‘무오독립선언서 ’로 알려진 대한독립선언..

    2024.10.10
  • 독립운동가 윤능효(尹能孝) 1882년(고종 19) 3월 18일~1953년 10월 10일

    독립운동가 윤능효(尹能孝) 1882년(고종 19) 3월 18일~1953년 10월 10일 1919년 3‧1운동 지원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노령(露領) 신한촌(新韓村)에 있는 자신의 집에 동지 최봉준‧우덕순‧김치보 등과 재러 한인대표 위원을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파견할 것과 여비로 5만 루블을 거출할 것을 의결하고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모색하였다. 안중근(安重根)의 거사를 지원하기 위해 200원을 지급하였다. 윤능효 선생은 함남 함흥(咸興) 출신으로, 1904년 7월 노령 해삼위(海蔘威)로 망명하여 1907년 노령 신한촌(新韓村)에서 최봉준(崔鳳俊)·우덕순(禹德淳)·김치보(金致甫) 등과 함께 일제의 침략에 대한 격퇴 계획을 수립하고 활동함 선생은 1909년 10월 안중근(安重根)이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

    2024.10.10
  • 독립운동가 조명하 선생(1905.4.8~1928.10.10)

    독립운동가 조명하 선생(1905.4.8~1928.10.10)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하리라." 일본 육군대장을 칼로 척살하다. “나는 삼한(三韓)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 하리라.” - 조명하 의사, 1928년 10월 10일 오전 10시 타이완 타이페이의 일제 처형장에서 순국 직전 남긴 유언 - 조의사가 순국한지 3개월 17일 뒤인 1929년 1월 27일 일본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는 단검의 극약이 온 몸에 퍼져 목숨을 잃었다. 한국 침략 주체인 제국주의 일본의 육군 대장을 척살하기로 한 의사의 거사가 성공한 것이다. 중국 침략을 앞..

    2024.10.10
  • 독립운동가 이봉창 선생(1900.8.10~1932.10.10)

    독립운동가 이봉창 선생(1900.8.10~1932.10.10) 용산의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가게 점원과 철도 운전 견습생 등으로 일하다가 1919년 이후 일을 그만두고 동해를 건너 일본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뒤 조카인 이은임과 함께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때 철도국을 그만 둔 일본인 지인이 조선인 식모를 구하여 데려가고 싶다는 의사를 타전해오자 자신의 조카딸인 이은임을 식모로 주선하여 여비를 받았다. 이 여비로 일본인, 조카 이은임 등과 함께 배편으로 일본으로 건너온다. 1930년 30세의 이봉창은 미혼이었다. 일본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여행과 함께 노동으로 허기를 채우며 적정을 정탐하기에 힘썼다. 1931년 나고야에서는 병이 들어 병석에 눕게 되었다. 한 친구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게 되어..

    2024.10.10
  • 독립운동가 장석천 선생(1903.2.25~1935.10.8 )

    독립운동가 장석천 선생(1903.2.25~1935.10.8 ) 광주학생운동의 함성을 전국적인 학생독립운동의 불길로 키워내다. 장석천 선생은 일제강점기 당시 전남청년연맹 상무집행위원장으로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학생투쟁지도본부를 결성했다. 광주학생운동의 불길을 우리 독립운동의 일대 전환기로 만들고자 신간회와 협력하여 운동을 경성과 전국에 확산시켰다.

    2024.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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